챕터 40 : 위험한 협상
며칠간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분명히 잠겨 있어야 할 현관 자물쇠가 허망하게 열려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마치 누군가의 초대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만,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조우임을 직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익숙한 집 안 공기가 평소와 달리 낯설게 느껴졌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하는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의 무언가가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건장한 손이 내 등을 밀어 천천히 거실로 내몰았다.
거실 소파에는 유태경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공포감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그의 사냥터 한가운데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왔구나, 도꾸."
태경이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안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찾아온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리 순순히 잡혀 주다니.
보육원에서나 지금이나 멍청한 조센징은 어쩔 수 없나 보군."
'조센징'이라는 그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얼굴에 주먹을 한 방 꽂아주고 싶었지만,
등 뒤의 괴한이 무언가를 더욱 힘주어 내 목덜미에 가져다 대며 위협했다.
차가운 날의 감촉이 피부에 닿는 듯했다.
태경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왜, 나를 한 대 치고 싶은가 보지?
자, 한번 쳐봐. 어서. 이래서야 내가 너무 심심하잖아."
그는 나를 도발했다.
내가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자, 그의 눈에 경멸이 스쳤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힘껏 주먹으로 나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건장한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펀치에 고개가 돌아가고 몸이 휘청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나의 풀이 죽은 모습에 태경이는 만족한 듯 입 꼬리를 올렸다.
"감히 조센징 따위가 우리 야나기 가문의 명예를 능멸해?
네놈 덕분에 우리 가문은 이제 하찮은 조센징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도굴꾼 집안이 되었어.
네놈 목숨으로 네가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할 거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혹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침착하려 애썼다.
지금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야 할 때였다.
"잠깐… 잠깐만, 태경아. 내 생각이 짧았어.
너에 대한 열등감과 복수심에 눈이 멀어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우리가 에덴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을 생각해서라도…
목숨만은 살려줘. 이렇게 빌게."
나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태경이는 나의 연기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내가 멈추라고 했을 때 멈췄더라면 좋았잖아.
이제는 이미 늦어 버렸어. 내 자존심이 많이 상했거든."
그는 내 등 뒤의 괴한에게 이제 나를 처리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잠깐, 잠깐만!"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태경이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네가 코끼리 바위에서 꺼내 간 유물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아직… 남아있는 게 있어."
태경이의 눈빛에 의심이 스쳤지만, 이내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살려고 별 짓을 다 하는구나.
동굴 안이라면 이미 샅샅이 뒤졌어.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내가 어리석어 보여?"
"정말이야."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노 원장이 준 요구르트를 다 토해낸 날,
혹시라도 나중에 내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유물 하나를 나만 찾을 수 있는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어.
네가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을 거야.
나를 앞세워서 코끼리 바위로 가보면 되잖아.
나는 너에게 숨겨둔 마지막 유물을 넘겨줄 테니, 너도 네가 잡고 있는 인질들을 놓아줘."
태경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인질들'이라는 단어에 미세한 동요가 일어났다.
"인질들? 최기철 말고 또 누구를 말하는 거야?"
"한수련 부원장님과 한초희 말이야."
그는 나의 말을 듣더니 다시금 비웃음을 흘렸다.
"도꾸야, 협상이라는 건 말이다, 양쪽이 대등한 관계일 때 가능한 거란다.
네 등 뒤를 봐. 네가 지금 나와 협상이 가능한 것 같니?"
그는 내 등 뒤의 괴한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네가 말하는 그 마지막 유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지에 따라 네가 살 수도,
네가 말하는 그 인질들이 풀려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러나 만약 네 말이 거짓일 때는…
넌 그 자리에서 바로 노도술 영감을 만나러 가게 될 테니,
네가 숨겨뒀다는 유물이 아직 그 자리에 있기만 빌어."
그의 말에는 위협적인 단호함과 함께,
한편으로는 감출 수 없는, 일말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밧줄로 손발이 묶인 채 양쪽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건장한 괴한 둘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낯선 차량의 뒷좌석에 던져졌다.
엔진 소리만이 적막한 밤을 가르며 어딘가로 향했다.
창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차가 멈춰 선 곳은 익숙한 냉기가 감도는,
바로 그 코끼리 바위가 있는 산 입구였다.
어둠 속에서도 거대한 코끼리 형상의 바위는 묵묵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심장은 불안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고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