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1 : 다시, 코끼리 바위
묶였던 손과 발의 밧줄이 풀리자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손목은 자유로웠지만,
육중한 괴한 둘이 내 앞과 뒤를 그림자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태경이는 묵묵히 앞장섰다.
랜턴과 플래시 불빛만이 칠흑 같은 어둠을 겨우 가르는 산길이었다.
발 밑의 흙은 축축했고, 나무뿌리들은 거미줄처럼 얽혀 발걸음을 방해했다.
팽팽한 침묵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공기를 갈랐다.
나는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고자 했다.
"태경아… 기억나?
보육원 뒷산에서 몰래 칡 캐러 다녔던 거.
그때 네가 뱀을 보고 기겁해서 도망치다가 넘어졌잖아.
그때도 내가 네 손 잡아 일으켜줬는데."
내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허무하게 울렸다.
태경이는 뒤돌아 보지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은 철벽처럼 단단했고,
그 침묵은 나를 향한 그의 증오만큼이나 깊었다.
뒤따르던 괴한의 거친 숨소리만이 내 귓전을 스쳤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 나는 불현듯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도대체 그 좁은 코끼리 바위 입구로 어떻게 들어간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우리 중에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태경이는 한참을 대답 없이 산을 오르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의 그림자가 거대한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뒤따르던 괴한들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했다.
앞서 걷던 괴한이 묵직한 삽을 들고
바위 옆에 쌓여 있던 무성한 나뭇가지들과 흙더미를 거칠게 치웠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마침내, 태경이의 입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래서 멍청한 조센징들이 대일본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거야.
왜 꼭 그 좁은 틈바구니로만 기어 들어가려고 하냐는 말이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는 멍청한 조센징들. 흐흐흐."
그의 비웃음 소리가 한밤중의 산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뭇가지가 걷히자,
사람 한 명이 겨우 몸을 웅크려 들어갈 만한
어둡고 축축한 땅굴 입구가 드러났다.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역시 도굴꾼의 손자 답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뒤에 서 있던 괴한이 나의 등 뒤를 모질게 밀었다.
나는 균형을 잃고 땅굴 안으로 고꾸라졌다.
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플래시를 입에 물고, 바닥을 짚으며 기어갔다.
좁고 어두운 통로는 폐부를 짓누르는 듯 답답했다.
흙먼지가 코와 목으로 스며들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축축한 흙의 감촉이 손바닥과 무릎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십여 분쯤 기어갔을까,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보는 30년 만의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지는 코끼리 바위 안의 동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둠 속에 숨겨진 거대한 공간은 여전히 신비로웠다.
나는 플래시 불빛을 바닥으로 향했다.
숨겨두었던 네모난 사각형의 보석함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낡은 보자기 하나를 집어 들어 보석함을 정성스레 묶었다.
흙먼지가 묻은 손으로 보자기를 매듭짓는 동안에도 심장은 쿵쾅거렸다.
입에는 플래시를 문 채,
한 손에는 보석함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태경이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땅굴 입구에 거의 다 온 듯했다.
희미한 바깥 빛이 좁은 통로 끝에서 아른거렸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괴한 중 하나가
보자기에 싼 보석함을 먼저 건네 달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는 주저 없이 보석함을 그에게 건넸다.
그의 손에 보석함이 닿는 순간,
뒤에 있던 다른 한 명의 괴한이 모진 발길질로 나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퍽!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다시 땅굴 속으로 나동그라졌다.
폐를 짓누르는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흙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흙과 돌멩이가 땅굴 입구를 막아섰다.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흙먼지가 폐부를 짓눌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생매장당하는 건가.
정신이 아득했다.
몸부림칠수록 흙은 더욱 나를 조여왔다.
차가운 절망이 온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