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2 : 뒤바뀐 운명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멍청한 조센징 녀석.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나를 쫓는 일을 멈추라고 친절한 경고까지 했는데,
결국 내 충고를 듣지 않아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노도술 하나로 족하다.
그를 그곳에 묻어버리고 온 것은 잘한 일이다.
그는 그 산속에서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다.
거대한 바위 아래,
흙더미에 짓눌려 숨조차 쉬지 못할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그림자 하나를 영원히 지워버렸다는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차는 부드럽게 어둠을 가르며 인적이 없는 곳에 마련해 둔 별장으로 향했다.
보자기에 싸인 보석함을 품에 안은 채,
내 안에서는 묘한 만족감이 차 올랐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마지막 유물을 열어볼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제 이것으로 할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이다.
기나긴 여정이었다.
눈을 감고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유복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짧은 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도,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니의 비극적인 자살,
에덴 보육원이라는 지옥.
그곳에서 겪었던 천박한 조센징들 사이에서의 처절했던 시간들.
노도술에 대한 복수심이 나를 지탱했고,
야나기 가문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일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 모든 시련들에 대한 보상이 이제야 이루어지는 것만 같았다.
별장에 도착할 때쯤,
동쪽 하늘이 으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희미한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다.
마치 하늘이 나의 귀환을,
나의 승리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보석함을 애기 다루듯 품에 안고 개인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고요했다.
벽을 가득 채운 고서들과 고미술품들이 새벽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탁자에 보석함을 올려두고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낡은 천이 벗겨지고, 네모난 보석함의 윤곽이 드러났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마지막 유물은 과연 무엇일까?
보석함의 크기로 보아 작고 귀중한 무언가일 것이 분명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보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뜻밖에도 낡은 수첩이었다.
신라시대 유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수첩의 표지는 세월의 흔적으로 바래 있었고,
흐릿하게 번진 글씨로
'노도술'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나는 수첩을 펼쳤다.
빼곡히 적힌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자 (年月日) / 도굴 장소 / 유물명 / 매매처 / 거래 금액 (円) / 이시하라 배당 (円) / 비고
1943.03.12 / 경주 남산 기슭 / 금동관 (파손 일부 있음) / 조선총독부 내 사적물상사 / 1,200円 / 600円 / 운반 시 손상
1943.04.27 / 포항 흥해읍 고분 / 신라 토기 3점 / 오사카 민예상회 / 480円 / 240円 / 야간 반출
1943.05.10 / 경주 황남동 / 청동거울, 곡옥 포함 6점 / 교토 제국대학 연구실 / 1,650円 / 825円 / 사진자료 요구받음
1943.06.08 / 울산 반구대 / 철제 무구류 (검 2자루, 창 1자루) / 동경 민속박물관 / 2,300円 / 1,150円 / 해상 운송
1943.08.19 / 대구 팔공산 근방 / 토우(土偶) 형상 2점 / 요코하마 고미술회 / 920円 / 460円 / 신속 거래 요청
1943.09.30 / 경주 계림 인근 / 금제 귀걸이 세트 / 개인 수집가 (이름 비공개) / 3,100円 / 1,550円 / 도쿄 발송 완료
이건… 이건 분명 노도술의 도굴 일지다.
할아버지 야나기 칸조와 노도술이 함께 저질렀던 추악한 밀거래의 기록.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야나기 가문의 명예를,
이 낡은 수첩이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강덕구 이 새끼가…
끝까지 우리 할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 우리 가문을 욕보인 것이다.
분노가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코끼리 바위로 다시 찾아가
그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지배했다.
흙더미에 파묻힌 그의 시체를 다시 파 헤쳐서라도…!
바로 그때였다.
서재 문이 스르륵 열리고,
흙으로 범벅이 된 강덕구가 마치 유령처럼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나를 향한 지독한 증오와 함께,
알 수 없는 승리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어떻게… 어떻게 빠져나왔지?"
나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