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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챕터 44 : 마지막 퍼즐

by BumBoo

납골당 앞,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희미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와 한초희는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숨소리만이 아련하게 울렸다.


마치 영원한 잠에 빠진 누군가를 추모하 듯,


우리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그 침묵 속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 한편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


기철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


납골당 앞에 작은 꽃 한 송이를 조용히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로가 역력했지만,


눈빛은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납골당 안,


투명한 유리 너머에는 한초희와 꼭 닮은


젊은 시절의 한수련 부원장님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


그 미소는 여전히 변함없이 따뜻했다.


한초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한 번씩 덕구 씨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꼭 아들 삼았으면 했던 귀여운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고…."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솟구치는 감정의 파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마음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죄송합니다… 부원장님."


나는 작게 읊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기철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초희에게 달려들 듯 물었다.


"아니, 9시에 다시 오라고 하고선 대체 어디를 간 거예요?


그리고 그 미키 마우스 컵은 또 뭐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초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납골당 안의 어머니 사진에 잠시 머물렀다.


"유태경은…


어머니를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처럼 집착했어요.


그래서 아픈 어머니를 돌봐 준다는 명목으로 별장에 가둬 두었죠.


사실상 인질이나 다름없었어요.


저에게도 별장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고요.


저는 어머니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그의 비서로 일할 수밖에 없었죠.


매일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제 유일한 낙이었어요."



한초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언저리에 얹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회한과 함께 애틋함이 스쳤다.



"두 분이 카페에 찾아오신 날 늦은 오후,


유태경으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알고 보니 저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더군요.


저는 두 분이 어머니와 저를 구해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카페에 두고 온 것이 있다고 핑계를 댄 후에 다시 카페로 돌아갔지만…


유태경이 감시를 붙여둔 탓에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죠.


다행히 두 분이 제가 남겨둔 단서를 발견하신 것을


몇 주 뒤 다시 카페에 들렀을 때 알게 되었어요.


이 정도면 궁금증이 조금 풀리 셨을까요?"



한초희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웃음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밝음이 깃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짓눌렸던 그림자가 걷히는 듯했다.



기철이의 타깃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넌 그럼 어떻게 그 녀석의 별장 위치를 알아낸 거야?"



나는 피식 웃었다.



"야나기 케이가 나를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안 순간부터 마음이 바빴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지.


사냥꾼이 덫을 놓듯이 말이야.


우선… 그때 네 차에서 찾은 GPS가 필요했어.


그리고 케이가 그 GPS 발신기를 자신의 비밀 별장으로 가지고 가도록 만들어야 했지.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다시 코끼리 바위 안에 있는 '유물'에 숨기는 수밖에 없더라고.


그때부터 진짜 고민이 시작됐어.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동굴을 케이는 무슨 수로 들어갔을까?


그때 문득…


만약 내가 도굴을 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났어.


그래, 땅굴을 파서 들어가면 되는구나.


그때부터 코끼리 바위 둘레를 등산용 지팡이로 마구 찌르고 다녔지.


그렇게 땅굴 입구를 발견하고 보석함에 GPS를 숨겨둔 거야."



"그럼 그 보석함도 네가 준비한 거야?"


기철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30년 전에 내가 그 보석함을 숨겨두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리고 그 보석함에 노도술의 사무실에서 몰래 훔친 거래 장부를 숨겨두었지.


어린 마음에도 노도술을 감옥에 처넣을 결정적인 단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야 한수련 부원장님이 자유로워질 거라고 믿었거든."



"흙구덩이에서는 어떻게 살아 나온 거야?


도대체 누가 꺼내준 거야?"



기철이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누가 꺼내주긴. 경찰이 꺼내줬지.


네가 실종되었다고 신고하러 갔을 때는 그렇게 무관심하던 경찰이,


한창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유물 밀반출 사건이라니까 그렇게 적극적이더라.


며칠 몇 시쯤 야나기 케이를 유인해서 어디로 데리고 갈 테니


잠복해서 숨어있으라고 계획을 이야기하니 아주 협조적 이더라고.


이제 궁금한 게 좀 풀렸냐?"



기철이는 아직도 묻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 눈치였지만,


나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라며 말을 잘랐다.



"그나저나 유물은 다 국가에 환수된다지.


나중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겠네.


가치가 어마어마할 텐데."



기철이 아쉬운 듯 내뱉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유물의 가치를 좇는 듯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물건이든 다 제자리가 있는 법이야.


이제 그만 마음속에서 놓아줘라."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옥가락지를 꺼냈다.


옥빛 투명한 그것은 손바닥 위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순간 기철이의 눈이 번쩍였다.



"야, 그거 그 자식이 가지고 있던 거잖아!


이것 때문에 내 손이랑 발이 이 모양이 됐는데. 어디서 난 거야?"



"어디서 나긴. 케이의 별장에 갔던 날, 몰래 가져왔지."



"이야, 강덕구. 역시 의리가 있구나. 어디 이리 줘봐. 이건 얼마나 하려나."



기철이는 옥가락지를 덥석 잡으려 했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너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인마."



나는 옥가락지를 한초희에게 건넸다.


"초희 씨, 이건 어머니께서 노도술에게 잡혀와 보육원에서 지낸


지옥 같았던 나날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초희 씨가 가지고 계세요.


만약 케이에게서 빼앗은 물건이라 께름칙하시다면…


기철이가 현금화하는 걸 도와드릴 거예요.


그렇지, 기철아?"



기철이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옥가락지에서 떠나지 못했지만,


한초희의 손에 쥐어진 그것을 더 이상 탐내지 않았다.


한초희는 옥가락지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간의 피로 때문인지, 그날 밤 정말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깊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잠.


그 속에서,


새로운 꿈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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