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시험지에 빨간 펜으로 그어진 오답 선처럼, 빨간 스포츠카가 회색빛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주변의 평범한 차들은 색이 바랜 풍경처럼 흘러갔지만, 이 빨간 차만이 강한 색깔을 뿜어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운전석에 앉은 여인의 긴 빨간 머리카락은 창밖으로 자유롭게 흩날렸다. 검은 선글라스 뒤에 감춰진 얼굴은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어려 보였지만,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과 턱선에는 흔들림 없는 단호한 생각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에는 피곤함이 없었다. 그 안에는 오직, 자신의 방식과 길이 진리라는 차가운 확신만이 빛났다.
가끔 도로의 느린 흐름을 방해하는 앞차들이 나타나면, 그녀의 눈빛에는 순간 불쾌한 신경질이 스쳤다. 마치 앞에 있는 차들을 무시하려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핸들을 꺾어 그 차들을 거침없이 앞지를 때, 그녀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즐거움이 옅게 번졌다. 그것은 마치 다른 차들을 깔아뭉개는 지배자의 시원한 기분 같았다. 스피커에서는 킹 크림슨의 '문차일드(Moonchild)'가 편안하면서도 날카롭게 흘러나왔고, 그녀는 리듬에 맞춰 낮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자기만의 확고한 세상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규칙과 상식을 지워버렸다. 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인천 국제공항 표지판을 지나쳤다.
퇴근 시간과 겹친 도착장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녀는 익숙한 꽃다발을 들고 게이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선글라스 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는 오래 기다린 작은 기대가 감돌았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감정은 많이 무뎌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마침내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얼굴은 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하지만 그 딱딱함은 감정이 아니라, 큰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보였다. 곧 그녀는 억눌렸던 모든 감정을 터뜨리듯 움직였다. 주변 시선 따위 개의치 않고 한달음에 달려가, 육십 대 중년 남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의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품과 익숙한 향기는 그녀의 단단했던 마음을 녹였고, 차가웠던 감정에 마치 가뭄 끝 단비처럼 스며들었다.
"세린아, 사람들 보는데서 이렇게 말괄량이처럼 굴지 말라고 했지?"
류현수 소장이 피식 웃으며 딸의 빨간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에게 세린은, 세상 모든 꾸밈없는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쉴 곳이었다.
세린은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속삭였다.
"아빠 만난 게 이렇게 반가운 걸 어떡해요? 3년이나 기다렸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지만, 그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깊은 사랑과, 그에게서 얻을 새로운 정보와 가능성에 대한 강한 열망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류현수 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요. 제 감정이 중요한 거지."
그 흔들림 없는 눈빛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판단은 아무 상관없다는 차가운 태도가 드러났다.
"3년간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류현수 소장이 한숨처럼 내뱉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감돌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세린은 자기 생각대로였다.
"그나저나 하시던 연구는 이제 끝난 거예요?"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궁금하기보다는 당장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류현수 소장의 밝았던 얼굴에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깊이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그래, 이제 끝났지. 그럼..."
세린의 날카로운 눈이 아버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결과가 안 좋았나 보네요. 우리 아빠, 기운이 없으시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동정하기보다는 진실을 끈질기게 파헤치려는 마음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결과가 너무 좋아서 문제지." 류현수 소장의 목소리에는 성취감 대신 복잡한 고민이 섞여 있었다.
"저한테는 무슨 연구인지 말도 안 해 주시고, 치사해요." 세린은 살짝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때가 되면 너도 자연히 알게 될 거야. 다만, 아직 공개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할까..." 류현수 소장은 말을 흐렸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사람처럼.
"자세한 이야기는 연구실로 가면서 해요. 참, 한국 음식 많이 그리우셨죠?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요." 류세린은 아버지의 복잡한 속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주제를 전환했다.
"아니다.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연구실이 엉망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일단 시냅스 코어로 가자꾸나. 가서 확인할 것들도 몇 가지 있고." 류현수 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연구실로 향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여튼 우리 아빠 일벌레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딸이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세린의 목소리에는 애정 어린 놀림과 함께 작은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
"무슨 말이야. 우리 딸을 믿으니까 아빠가 맡기고 3년이나 자리를 비웠지." 류현수 소장이 급히 변명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작은 망설임이 비쳤다.
"흥— 거짓말." 세린은 아버지의 말속에 숨겨진 미묘한 틈을 감지했다.
"아니, 진짜야." 류현수 소장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삼 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두 부녀는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공항을 벗어난 차 안에서, 류현수 소장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딸의 거칠고 위태로운 운전 습관을 걱정스럽게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세린아, 운전 습관이 3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이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는 건... 그 어떤 최첨단 안전장치로도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감당하기 어렵단다. 네가 운전할 때마다 아빠가 얼마나 조마조마한 줄 알기나 하니?"
아빠의 변함없는 잔소리에 류세린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대꾸하는 대신 조용히 스피커의 음량을 최대로 올렸다. 킹 크림슨의 사이키델릭 한 멜로디가 지하 주차장을 가득 메울 때까지, 류현수 소장은 이내 단념한 듯 고개를 젓다가, 결국 흥얼거리는 딸의 노랫소리에 맞춰 낮은음으로 따라 불렀다. 그렇게 유쾌한 음악 속에 둘만의 언어가 흐르는 동안, 차는 마침내 거대한 시냅스 코어 연구소의 지하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