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시냅스 코어 본관 7층, 류현수 소장의 연구실은 지하 수백 미터의 벙커처럼 외부와 단절된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끊임없는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온갖 논문 더미와 복잡한 수식이 뒤엉킨 화이트보드가 전쟁터처럼 펼쳐져 있었고, 류현수 소장은 흐트러진 머리카락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자료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밤낮을 이어온 연구의 지독한 피로와 함께, 쉽게 읽히지 않는 초조함과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따금 '쉬익, 갈갈갈' 날카로운 파쇄음이 서류 분쇄기에서 뿜어져 나와 연구실의 정적을 강렬하게 할퀴었다. 중요한 자료들이 미세한 조각으로 찢겨나가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류세린이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냉철하고 차가웠지만, 아버지의 과도한 몰입이 익숙하다는 듯 미미한 불만이 그녀의 예민한 미간에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장님, 이제 그만 퇴근하시죠? 덕분에 연구원들 모두 퇴근도 못하고 복도에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류세린의 목소리에는 권유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복도에 멈춰 선 채 감히 연구실 문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잠시 머물렀다.
류현수 소장은 쌓여 있는 서류더미에서 겨우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팬 눈가에 피로가 역력했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나. 자정은 넘지 않았겠지? 모두들 먼저 퇴근하라고 전해주렴. 나도 하던 것만 정리하고 곧 들어갈게. 너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 퇴근하렴." 그는 시계는 보지도 않은 채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다시 자료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종이 뭉치를 분쇄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저녁도 거르신 건 알고 계신 거죠? 미국 출장 가셨을 때도 매번 이렇게 끼니 거르시고 그러셨어요?" 류세린은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규칙조차 무시하는 것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못마땅함이 깔려 있었다.
"그럴 리가. 아빠 건강은 누구보다 아빠가 잘 아니까 걱정 말고 먼저 퇴근하렴. 아빠도 곧 들어가마. 내 차는 아직 지하에 있지?" 류현수 소장은 건조하게 대답하며 다시금 분쇄기에 종이뭉치를 집어넣었다. 파쇄음이 그의 목소리를 삼켰다.
"아무렴요. 제가 아주 새 차처럼 잘 관리해 뒀죠." 세린은 나직하게 답하며 한 발짝 다가섰다.
"그래, 그럼 집에서 보자. 오랜만에 네가 해주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부탁해도 될까?" 류현수 소장의 얼굴에 오래간만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잠시나마 그의 얼굴에서 연구의 그늘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러실 줄 알고 어제 미리 장을 봐뒀어요. 오랜만에 솜씨 발휘 한번 해야겠네요. 기대하세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가요. 빨리 들어오셔야 해요. 매번 혼자 저녁 먹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 난다구요." 류세린은 그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연구실 문을 나섰다.
창문 밖으로 검푸른 어둠이 시냅스 코어 빌딩 전체를 집어삼켰다. 류현수 소장은 여전히 분주히 서류더미와 컴퓨터 사이를 오가며 이따금 중요한 자료들을 무자비하게 분쇄기에 폐기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연구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수많은 정보들로 가득했다. 그래서였을까. 늦은 밤, 시냅스 코어 빌딩에 자신과 보안팀 외에 낯선 그림자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만에 실험이 아닌 요리의 목적으로 칼을 든 류세린은 익숙한 레시피 노트를 다시 한번 펼쳤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손수 적어주신 김치찌개 레시피였다. 그녀에게 요리란 감각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오차 없는 계산과 완벽한 결과물을 창조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단 1초, 단 1그램의 오차도 없이 어머니가 끓여주던 그 완벽한 김치찌개를 재현해 내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의 손끝을 지배했다. 몇 번이고 미세하게 간을 확인한 끝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옅게 번졌다.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간, 자신이 차려낸 풍성한 저녁 식탁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여튼, 하나에 꽂히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 집안 내력이라니까."
식어가는 김치찌개 앞에서, 그녀는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들었다. 연구실로 거는 전화는 당연히 응답이 없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보안팀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시냅스 코어 보안팀입니다." 덤덤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네, 류세린입니다. 혹시 소장님 아직 연구실에 계신지 확인 좀 부탁드려요.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네, 확인 후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아뇨." 세린은 순간 덧붙였다. "혹시 연구실에 계시면, 사랑하는 딸이 끓인 김치찌개가 식어가고 있으니 빠른 귀가 부탁드린다고만 전해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보안요원의 왠지 모를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작은 인간적인 감성이 튀어나온 듯했다.
정확히 몇 분 후, 류세린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보안팀. 그녀는 짧게 혀를 차며 전화를 받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전화를 안 받는 아버지에 대한 사소한 짜증, 그리고 알 수 없는 우려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웃음기 하나 없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류 팀장님, 죄송합니다. 급히 시냅스 코어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류세린의 눈동자에 아주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그 찰나의 흔들림은 그녀의 심장부를 관통했고, 결국 질문으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죠?"
"류 소장님께서… 괴한의 습격을 당하셨습니다." 보안요원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의 목소리는 곧 깨질 유리조각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습격이라뇨? 연구실에 계신 거 아니었나요? 보안팀은 뭘 하고 있었나요?" 류세린의 목소리 톤은 여전히 일정했지만, 차가운 얼음장 아래 살벌한 칼날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아버지를 향한 어떠한 침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지배적인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게..." 보안요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침묵은 진실을 숨기는 벽과도 같았다.
"그래서 많이 다치셨나요?" 류세린은 본능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손아귀가 휴대전화를 쥐어뜯을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모든 회로가 아버지의 안위에 집중했다.
"사… 사망하셨습니다."
그 단어는 거대한 쇠망치처럼 류세린의 머리를 강타했다.
류세린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그녀의 세계가 통째로 추락하듯.
짧지만 끈적한 침묵이 전화를 감쌌다. 류세린의 귀 속에서 무언가가 윙윙거리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눈앞이 아찔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모든 이성 회로가 일순간 정지하는 듯했다.
"뭐라구요." 그녀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그 한 마디는, 이제 막 깨져버린 세상의 가장 여린 비명 같았다.
"저희가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보안요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세상의 소리가 둔탁해졌다.
"바… 바로 갈 테니까… 구급차부터 불러주세요." 류세린은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억지로, 필사적으로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는 그녀의 처절한 노력.
"네, 이미 경찰과 구급대에 전화해 두었습니다."
류세린은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악몽, 혹은 만우절의 지독한 장난이길 바랐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심장이 조여드는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이성을 붙잡으려 애썼다. 차에 올라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연구소로 향했다. 도로는 그녀에게 또 다른 정글이 아니라, 분노를 토해내는 속도의 해방구였다. 시냅스 코어 7층, 류현수 소장의 연구실 앞에는 이미 경찰들이 도착해 폴리스 라인을 쳐 둔 상태였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깜빡였다. 연구실로 들어서려는 그녀를 건장한 경찰관이 막아섰다. 류세린은 매서운 눈초리와 얼음장 같은 단호한 말투로 자신이 딸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죽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노라고 말했다. 경찰관은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결국 길을 터주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바닥에는 붉고 흥건한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류현수 소장의 시신 위에는 흰 천이 처참하게 덮여 있었다. 감식반의 눈을 피해 한쪽 벽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킹 크림슨의 '문차일드'가 나른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고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시간 전, 아버지를 데려다주며 함께 흥얼거렸던 그 노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을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과 기묘하게 뒤섞이며, 류세린의 심장을 더욱 날카롭게 찢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천천히 흰 천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없는, 텅 빈 아버지의 동공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류세린의 견고했던 세계가 산산조각 났다. 그녀의 모든 논리와 이성이 의미를 잃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의 피 웅덩이에 멈췄다.
핏물 속,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듯한 선명한 숫자 '20'.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류세린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저주받은 예언처럼, 혹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처럼 박혔다. 그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울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통제 불능한 슬픔은 거대한 파도처럼 연구실을 뒤덮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연구원들은 류현수 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놀란 눈치였지만, 그들의 시선은 난생처음 보는 류세린의 처참한 모습에 더욱 고정되었다. 그녀는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항상 사무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존경하고, 의존하며, 감정을 드러내던 인물은 오직 한 명, 바로 류현수 소장, 그녀의 아버지였다. 이런 그가 방금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녀의 집 식탁 위에는, 단 1초, 단 1그램의 오차도 없이 정성껏 끓여냈던 김치찌개가, 주인 잃은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류세린의 희망처럼, 그녀의 견고했던 세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