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으로 칼칼한 김치찌개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도마 위에서 파를 써는 '타닥타닥' 소리가 귀에 나른하게 울렸다. 이젠 기억조차 흐릿해진 할머니가 오늘도 손주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이시나 보다. 따뜻한 봄 햇살이 이불처럼 얼굴을 감싼 꿈 속에서, 그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 이 달콤한 꿈이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그 순간, 할머니의 따뜻함, 김치찌개의 냄새, 그리고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그 시절에 머무르고 싶었다. 짧은 꿈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는 비로소 완벽했다. 현실의 힘든 일이 한 치도 들어올 수 없는 완벽한 안식이었다.
언제나처럼 현실로 돌아온 순간은 시끄러운 휴대전화 진동이었다. 윙— 윙—. 고시원 바닥에 놓인 그의 휴대전화가 얇은 벽까지 울릴 듯 날카롭게 진동했지만, 오늘은 그 소음마저 평소보다 덜 거슬렸다. 간밤의 꿈이 남긴 옅은 온기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뻑뻑한 눈을 겨우 뜨며 손을 뻗어 진동을 껐다. 겨우 다섯 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새벽까지 이어진 대리운전의 피곤함이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몸은 평소보다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작은 희망이, 마치 작은 행운의 징조처럼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는 습관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좁디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을 겨우 눕힐 수 있는 비좁은 고시원 방을 벗어나 서둘러 찬물 샤워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했다. 2035년 서울. 번화가 외곽에 있는 자동화 물류창고까지는 뛰어서 30분 거리였다. 그는 아침 운동 삼아, 혹은 몇 푼의 차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아스팔트 위를 묵묵히 달렸다. 그의 낡은 운동화가 콘크리트 바닥을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단순한 소리는 그의 쳇바퀴 같은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자동화 물류창고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숨은 턱 밑까지 차올라 있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은 어쩐지 피곤함보다 약간의 상쾌함이 앞섰다. 이곳은 거대한 로봇 팔과 무인 운반차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자동화 기술의 가장 앞선 곳이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일'은 이미 대부분 기계로 바뀌었고, 그의 동료들은 하나, 둘씩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규격에 맞지 않는 상자 포장이나 로봇이 처리하기 어려운 물건을 손으로 분류하는 등, '사람의 손'이 아직 필요한 마지막 틈새를 맡고 있었다. 가장 발달된 시스템 속 가장 기본적인 부분.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야, 이안! 일찍도 왔네?" 무인 지게차 옆에 기대어 있던 김 과장이 그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의 말투는 잠이 덜 깬 아침 특유의 퉁명스러움 그대로였다.
"네, 과장님도 평소랑 같으시네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묵직한 철문을 열었다.
"하하! 그래야 우리 창고가 돌아가지 않겠냐?" 김 과장이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 속에는 언젠가 자신들도 로봇으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옅게 스며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이안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웬일로 최 대리가 비교적 '사람이 할 만한' 업무인 반품 물건 검수 파트에 배정해 줬기 때문이었다.
"이안 씨, 오늘은 여기서 반품 물건들 검수 좀 부탁해요. 워낙 변수가 많아서 기계보다는 아무래도 사람이 보는 게 낫지." 최 대리의 미소는 평소처럼 미묘한 속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안은 그것을 그저 자신을 위한 배려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오늘, 평소보다 더 꼼꼼하고 빠른 속도로 반품된 전자기기의 미묘한 고장을 찾아냈다. 작은 성취감이 따뜻한 기운처럼 번졌다. 예상치 못한 작은 행운이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물류창고에서의 일을 예상보다 일찍 마친 후, 이안은 늘 그랬듯 근처 김밥집에 들렀다. 그의 주문은 늘 똑같았다. 김밥 두 줄.
"오늘은 좀 일찍 끝나셨네요? 총각." 주인아주머니가 빙긋 웃으며 라면 한 그릇을 불쑥 내밀었다.
"오늘 키오스크가 고장 나서 주문 오류가 났지 뭐야. 라면 하나가 더 끓여졌네. 버리긴 아깝고… 총각, 이왕 이렇게 된 거 총각이 먹어. 오늘은 내가 특별히 서비스 주는 거야." 이안은 순간 놀란 눈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꿈속의 김치찌개는 아니었지만, 이 예상치 못한 따뜻한 인심은 그의 힘든 하루를 작게나마 위로해 주었다. 라면 국물처럼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도시가 어두워질 무렵부터, 이안은 다시 밤의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밤 9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 첫 번째 콜이 휴대전화 화면 위를 번쩍이며 떠올랐다. 멀지 않은 곳. 기뻐할 시간도 없이 이안은 본능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돈. 그 한 단어가 그의 모든 피곤함을 씻어냈다.
2035년의 도로는 자율주행차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남아 있었다. 대리운전은 이제 능숙한 운전 기술과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춘 '공식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문 직업이었다. 손님들은 앱을 통해 등록된 기사의 정보(이름, 경력, 평가 등)를 확인하고 직접 부르거나, 혹은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기사를 선택했다. 이안에게 뜬 콜은 분명 자신을 직접 고른 호출이었다. 이안은 그저 오늘은 뭔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의 작은 행운에 감사했다.
언뜻 보아도 고가인 듯한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차 앞에서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양복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에게서는 취객의 흔한 냄새 대신 희미한 고급 담배 향이 풍겨 나왔다. 이런 최신 자율주행차 주인이 대리운전을 부른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의 오랜 경험은 겉모습만으로도 상대의 본질을 짐작하게 했다. 기술을 완전히 믿지 못하거나, 혹은 말동무가 필요한 부자들.
이안이 차에 다가서자, 남성은 아무 말 없이 뒷좌석 문을 열어 몸을 실었다. 그의 침묵은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안은 백미러로 남성을 슬쩍 보았다. 남성은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이안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마치 정밀한 검사를 하는 듯 날카로웠다. 이안은 기분 탓인가 싶어 운전대를 잡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가죽의 느낌. 왜인지 모를 이질감이 그의 본능을 스쳐 지나갔다.
이안이 운전석에 앉고 목적지를 다시 확인했다. 도시 외곽, 꽤 먼 거리였다. 이번 호출이 밤샘 운전으로 이어질 길고 긴 여정임을 그는 파악했다.
백미러 속 남성의 눈이 순간 이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차분하고 지적이었다. 그는 말없이 이안의 운전을 지켜봤다. 이안은 그저 말이 없는 손님이라 여겼다. 가끔 이렇게 과묵한 손님들이 있었다. 특히 상위층 중에는 자신의 사적인 공간과 시간을 침범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교양 있는 부유층의 독특한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딘가 찜찜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묵묵히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는 닳고 닳은 시계처럼 똑같은 이야기들을 예상했었다. 돈 자랑, 자식 자랑, 혹은 세상에 대한 불평 따위. 하루에 수십 번씩 듣는 별것 아닌 이야기들. 그러나 그날 밤의 손님은 달랐다.
한참을 말이 없던 남성이 갑자기 백미러 속 이안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매우 평온했지만, 어딘가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안 기사님, 한 가지 제안을 하죠."
이안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본능이 아주 희미하게 경고음을 울렸지만, 오늘은 운수 좋은 날. 어쩌면 예상치 못한 행운일 수도 있었다. 그의 마음속 저울이 적은 가능성을 향해 기울었다.
'오늘의 이 예감이, 이 작은 행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했다.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대리비의 열 배를 지불하겠습니다. 어떠신가요?" 남성의 목소리에는 강요 없는 부드러운 제안의 형태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거부하기 힘든 압박을 품고 있었다. 그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뭔가 깊고 비밀스러운 가치를 요구하는 듯했다.
열 배. 그 말에 이안의 온몸에 강렬한 전류가 흐른 듯했다. 지금 그의 통장 잔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고시원의 싸구려 벽지, 눅눅한 공기, 차갑게 식어버린 김밥. 그 모든 절망적인 현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인생은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깊숙이 숨기고 싶은 상처와 부끄러운 일뿐이었다. 하지만 돈 앞에서는 그 어떤 자존심도, 과거의 아픈 기억도 의미 없었다. 열 배의 대리비. 이안에게는 그야말로 예상 밖의 행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희망 같았다.
"좋습니다, 손님." 이안은 나직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작은 흥분과 함께, 밀린 고시원 월세와 공과금, 그리고 고단한 현실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낼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는 막연한 예감이 스며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꼭 필요했던, 숨통을 트이게 할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