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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Lucky Day II

by BumBoo

"아무 데나 좋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보시죠." 남성은 조수석 머리받침에 등을 기댄 채 편안하게 팔짱을 끼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오늘은 그 지적인 빛마저 묘하게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가장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줄 지식인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이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머릿속은 과거의 조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장 특별한 순간이라. 그에게 '특별함'은 언제나 불행과 함께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가장 강렬한 '특별함'은 짧지만 눈부셨던 행복의 기억이었다. 그는 힘든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잡고,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 기억 속 가장 처음은 아마… 행복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 대리 운전기사나 하면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중학교까지는 부모님과 꽤 잘 사는 집에서 자랐어요.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쯤은 됐었죠. 이른 아침, 아버지의 면도 거품 냄새와 출근할 때 양복 입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든든하게 들렸죠. 어머니는 늘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주셨고요. 매년 여름이면 강원도 푸른 바닷가로 떠났습니다. 따뜻한 햇살 아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모래성을 쌓고, 튜브 위에서 까르르 웃던 부모님의 얼굴이 제 눈앞에 아직도 선명해요. 특별한 건 없었지만, 그 시간들은 제게 매일이 빛나는 선물 같았습니다. 언제나 든든하게 출근하시던 아버지의 등을 보며 '나도 꼭 자라서 아버지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믿음직한 가장이 되어야지' 하고 늘 생각했었죠."


이안은 룸미러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말이 경청되고 있는지, 혹은 지루해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오랜 습관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은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 시선을 확인한 이안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에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의 눈앞에는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그 시절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의 손에 쥐인 운전대는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흐릿한 경계처럼 느껴졌다.


"집에 유일한 그늘은… 형이었습니다." 이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존재는 늘 아물지 않는 상처이자,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아버지 사업이 자리 잡기 전, 집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채 한 살이 되기 전에 해외로 입양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요. 기억조차 없는 형의 존재는 제게 늘 미안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서운함을 안겨줬어요. 저는 따뜻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는데, 형은 남의 손에서… 어디선가 외롭게 자라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늘 아팠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한 후, 형을 다시 데려오려고 참 많이 애썼습니다. 입양기관을 통해 수십 번 연락을 시도했죠. 하지만 형은 단호했어요. 모든 만남과 정보 공유를 거부했거든요. 아마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컸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는데, 형은 모든 걸 빼앗긴 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형은 제 삶의 '항상 마음속에 있지만 만날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고, 저에게는 손댈 수 없는 숙제처럼 남아버렸죠."

이안은 말을 맺으며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백미러 속 남자의 반응을 살피는 대신, 쏟아져 나온 감정을 스스로 가다듬기 위해 시선을 운전대에 박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상처가 다시 터져 나오려는 듯, 먹먹한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다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인 2014년, 모든 것이 깨졌습니다. 단단했던 제 세상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죠. 부모님 모두 갑작스러운 선박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뉴스는 사고 현장을 하루 종일 생중계했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이 저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병원 복도에 울려 퍼지던 사람들의 흐느낌과 부모님의 침묵. 그리고 의사의 입에서 들려온 '사망' 두 글자는 차가운 현실이 되어 심장을 아프게 찔렀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폰에서 발견된 문자 메시지는… '이안아, 꼭 네 형을 찾아줘'였습니다. 선명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가혹한 유언이었죠."

이안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그는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비극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귓가에는 아직도 병원 복도에서 들리던 울음소리,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는 부모님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저는 갑자기 고아가 되어 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결국 문을 닫았고, 남겨진 건 빚뿐이었죠. 저는 할머니를 따라 낯선 시골로 이사했고, 삶의 모든 풍경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가난했지만, 할머니는 늘 따뜻한 손길로 저를 보듬어 주셨죠. 할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제게 말씀하셨어요. '이안아, 사람은 배는 곯아도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 저는 할머니의 말이 가진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밤낮없이 책에 매달렸죠. 아버지 회사를 다시 살리겠다는 막연한 꿈, 혹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직 책을 파고드는 것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먼 과거를 회상하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가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방울처럼 아련한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다 2020년,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이안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잠시의 침묵이 차 안을 묵직하게 채웠다. 룸미러 속 남자는 여전히 말없이 경청하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때로는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안은 다시 말을 이었다.

"병실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유리창 너머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면회는 불가능했죠. 할머니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흰 천이 덮인 할머니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그때의 무력감이 저를 짓누릅니다. 요즘도 할머니가 해주던 김치찌개가 미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얼큰하고 따뜻한 그 맛과 그 안에 담긴 할머니의 사랑이요. 고3 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지만,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에서 공부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게 우선이었죠. 결국 대학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은 포기했고, 그때부터 손에 잡히는 일들은 불법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닥치는 대로 하며 지금까지 하루하루 버텨오고 있습니다. 낮에는 마트 물류창고에서 규격에 맞지 않는 물건들을 손으로 분류하고, 밤에는 대리운전… 잠잘 시간조차 아까운 파란만장한 인생이죠."

이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인생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소설 속 비극보다 더하다고 들릴 만했다.


남성은 말없이 이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동정하는 마음도 읽을 수 없었다. 오직 차분하고 분석적인 시선만이 이안의 뒤통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시선마저 이야기에 집중하는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처럼 보였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마치 중요한 자료를 분석하는 듯했다.


"형은… 혹시 찾았나요?" 남성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분함 속에 어딘가 궁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입양기관에 문의했더니, 상대방이 동의해야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형은 아직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큰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군요."

이안의 목소리에는 포기하는 마음이 깊게 깔려 있었다. 그와 형의 연락은 여전히 닿지 않았다.


"안타깝군요. 이제 남은 유일한 가족인데 말이죠."

남성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 차 안에는 잠시 고요가 흘렀다. 그 고요는 이안의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캄캄한 어둠이 바깥세상과 떨어진 차 안의 공기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차는 도시 외곽, 고급 저택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들어섰다. 담장 너머로 잘 가꿔진 정원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안은 남은 이야기를 삼키며 차를 몰아 저택의 넓은 지하 차고로 들어섰다. 차고는 마치 미래 영화 세트장처럼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차가운 금속과 콘크리트가 어우러져 아주 멋지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요금은 어떻게 결제하시겠습니까?" 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심장은 이미 대리비의 열 배라는 기대감으로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현실의 답답함을 잠시나마 풀어줄 희망처럼.


"현금으로 지불하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겠소? 현금을 쓸 일이 없다 보니 잘 가지고 다니질 않아서." 남성은 차분히 말하며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다.

이안은 그가 차고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넉넉한 대리비로 밀린 고시원 월세와 전기세, 수도세 같은 공과금까지 해결될 행복한 상상에 잠겼다.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다.


그때, 차량의 환풍구에서 미세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김이 서린 듯 희미했다. 에어컨 고장인가?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연기는 무서운 속도로 차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화학 약품 같은 역한 단내가 코와 폐로 들어왔다. 마치 수만 개의 바늘이 동시에 뇌를 찌르는 듯한 심한 고통이 머리 전체를 때렸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초점이 사라졌다. 마치 뇌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아찔함이 그를 덮쳤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하다가 순식간에 마비되는 듯한 느낌. 손발의 힘이 빠져나가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이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에 경련이 일었다. 이 차에 갇힌 채 죽는 건가? 이런 끔찍한 방식으로? 그의 머릿속을 강렬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의식이 흐려지는 혼란 속에서, 뿌옇게 된 차창 밖의 어둠 속에 커다란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조수석 문이 열리고, 그 어두운 모습들이 이안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하나같이 방독면을 쓴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가운 쇠처럼 빛나고 있었다. 마치 맹수들이 먹잇감을 노려보듯. 이안은 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몸부림쳤지만, 이미 그의 의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그의 몸은 자신의 통제 밖에 있었다.


"무… 무슨…" 그가 말하려던 것은 갈라진 숨소리로 변했다. 이안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의식을 잃고 운전대 위로 쓰러지는 그의 마지막 시야에는, 방독면 아래로 냉기만 가득한 사내들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이안의 '운수 좋은 날'은 그렇게 섬뜩하고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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