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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ual Suspect

by BumBoo

류세린은 폐허가 된 아버지의 연구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식어가는 아버지의 시신.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의 앞에서 웃던 이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견고한 이성을 완전히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통곡은 이성을 넘어선 원시적인 고통의 절규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존재, 류현수 소장. 그의 죽음은 류세린의 세계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피와 혼돈 속, 내팽개쳐진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어대며, 아버지의 이름, '아빠'라는 단어를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올 듯 수없이 되뇌었다. 목놓아 울던 통곡이 잦아들었을 때, 그녀는 서서히 몸을 가누었다. 이미 영혼까지 모두 쏟아져 나온 듯,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거대한 슬픔은 역설적으로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어 기제가 되었다. 이제 슬픔조차도 논리적으로 분석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었다.


장례식은 마치 미리 프로그래밍된 시스템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류세린은 텅 빈 눈동자로 빈소를 지켰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녀의 감정은 이미 진공 상태였다. 슬픔을 느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 그녀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감정 없는 완벽한 인형처럼. 대중 앞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절제된 슬픔을 연기했다. 슬픔이라는 감정마저 해부하듯 냉철하게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시냅스 코어의 새로운 수장이 된 그녀에게 세상은 아버지를 잃은 딸의 연약함 대신, 천재 뇌과학자의 강인함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장례식 직후, 류세린은 지체 없이 보안팀을 소집했다.


회의실 테이블 중앙에는 사건 당일 CCTV 영상과 보안 구역 접근 기록이 담긴 홀로그램이 푸른빛을 내며 떠올랐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것들은 불쾌할 정도로 선명한 증거였다.

"사건 당일 야간 당직 책임자들." 류세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정은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움을 넘어선 절대적인 무심함이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테이블 끝에 서 있는 보안팀장 김진석을 꿰뚫었다. 김진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지만, 그 시선은 날카로운 메스처럼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류 박사님, 사건 당일 야간 당직 인원은 총 다섯 명이고, 제가 총괄 책임자였습니다." 김진석 팀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다섯 명과 김 팀장의 사직서를 오늘 중으로 인사팀에 제출하십시오." 류세린은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 작은 소리가 회의실의 팽팽한 정적을 갈랐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단단히 닫힌 감정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어떠한 설명도, 변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단 한마디의 명령으로 그녀는 그들의 생계를 끊어버렸다. 시냅스 코어의 핵심이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한 대가는 그것뿐이었다. 재론의 여지는 없었다.

김 팀장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분노와 체념이 교차했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어떤 반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류현수 소장의 죽음 이후, 시냅스 코어는 연일 류세린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모두의 관심은 그녀가 언제, 누구에게 폭발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류세린은 마치 아무 감정 없는 기계처럼 아버지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가며 업무를 처리해 갔다. 슬픔은 그녀의 사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개인 단말기 속, 보안팀으로부터 전송받은 사건 당일 CCTV 영상 파일만은 차마 열어보지 못했다. 그 파일 속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담겨 있을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결코 열어서는 안 될 악몽의 상자였다.


며칠 뒤, 류세린에게 경찰의 연락이 닿았다.

"범인을 특정했습니다."

수사팀장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활기 넘쳤지만, 류세린은 순간 의아했다. 시냅스 코어의 철통 같은 보안을 그토록 쉽게 뚫고 들어온 범인이, 고작 며칠 만에 너무나 허무하게 잡혔다는 사실. 범인 특정이라는 표면적인 안도감 뒤편에서, 그녀의 예리한 직관은 무언가 너무나 쉽게 풀린다는 사실에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렸다. 이렇게 단순하게 끝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죠?" 류세린은 서울 시경 본부의 낡은 회의실 테이블에 팔짱을 낀 채 앉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최첨단 연구소의 한 부분처럼 완벽했지만, 이곳의 낡고 권위적인 분위기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수사팀장은 노트북 화면을 띄웠다. 흐릿하지만 분명한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아직 신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용의자 정보가 떠 있었다.

"범인은… 그게 참… 류 박사님. 현장 CCTV는 물론, 사방에 남겨진 지문과 족적이 명확히 이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매우 깔끔하게 모든 증거를 남겼더군요." 수사팀장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류세린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노트북 속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래서, 지금 그 범인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수사팀장이 다시 머뭇거렸다.

"이 범인은 현재 병원에 있습니다. 그것도… 뇌사 상태로요. 사건이 있기 일주일 전, 담당 의사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류세린의 새까만 눈이 맹렬하게 빛났다.

"뇌사 상태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아버지가 살해당한 날, 뇌사 상태의 환자가 병원에서 걸어 나와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범인'은 대체 무엇입니까? 유령이라도 체포한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회의실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뇌과학자인 그녀에게 그것은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니었다. 존재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뇌사 상태는 뇌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걷고, 문을 열고, 범죄를 저지를 수 없어요. 기본적인 반사 활동 외엔 어떤 의식적인 행동도 불가능합니다. 이런 현상을 '기적'으로 치부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경찰은 아직 21세기 초반의 미신을 믿는 겁니까?" 그녀는 싸늘하게 몰아붙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성과 논리로 정연하게 조직된 칼날이었다.


수사팀장은 땀을 닦았다. 곁의 형사가 나섰다.

"류 박사님, 저희도 혼란스럽지만, 증거는 명확합니다. 모든 과학수사 결과가 이 남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뇌과학자로서 설명은 어렵더라도… 상황은 그렇습니다. 혹시 그 남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류세린은 화면을 째려봤다.

"그 뇌사 상태의 살인자가 있는 병원이 어디죠?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류 박사님." 수사팀장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저희로서도 피의자의 신변 안전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곤란해집니다. 현재 범인은 병원에서 신변이 안전하게 확보되었고, 병실 앞도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범인의 신상과 정확한 위치는 현재로서는 공개해 드릴 수 없습니다."


류세린은 싸늘하게 실소했다. 그들이 자신을 '복수심에 눈먼 유족'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복수 이전에 '진실'이었다. 비이성적인 분노는 그녀의 통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설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설명을 구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녀의 심장 아래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분노는, 이제 차가운 복수심으로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굳이 경찰의 협조가 없더라도, 그녀에겐 모든 정보를 꿰뚫을 수 있는 자신만의 네트워크가 있었다.


류세린은 태연하게 경찰서 문을 나섰다. 어떠한 미련도 없었다. 불과 몇 시간 후, 그녀의 개인 단말기에는 범인의 신상 정보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정확한 정보가 떠올랐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스포츠카에 몸을 싣고 인공위성 지도를 따라 서울대학교병원을 향해 질주했다. 질주하는 스포츠카 속에서 그녀의 심장은 억눌린 격정을 토해내듯 뜨겁게 고동쳤다.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 입구는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흰 가운의 의사들과 간호사들만이 분주히 오갈 뿐이었다. 류세린은 시냅스 코어 패스를 흰 가운 주머니에 숨긴 채 태블릿 PC만 들고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연구 목적으로 방문했습니다. 뇌 활동 데이터 분석에 필요한 샘플이 있어서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했다.

중환자실 입구를 지키던 간호사는 그녀의 흰 가운과 시냅스 코어 패스를 힐끗 쳐다봤다.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연구를 이유로 한 유명 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이 이런 식으로 방문하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간호사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규칙이 아닌 오랜 관례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10분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마무리해주셔야 해요."


간신히 중환자 병동의 입구를 통과한 류세린의 새까만 눈동자는 복도 저 끝까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병실 하나하나를 훑어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한 병실 앞에서 멈췄다.


병실 앞에는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문을 굳건히 막고 있었다. 그들은 복도를 걷는 류세린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쏘아봤다. 특히 그녀의 길고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에 그들의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그녀는 침착하게 경찰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담당 의사가 보내서 왔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애써지어 보였다.

"전달받은 바가 없습니다." 한 경찰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류세린의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에 붙들려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곳은 현재 통제된 병실입니다. 관계자 여부를 떠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됩니다. 불상사에 대비하고 있으니, 즉시 돌아가십시오."

류세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블릿 PC를 찾듯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아, 이런. 담당의 소견서를 깜빡했네요. 여기 어디 있을 텐데…"

그녀의 거짓말은 능숙했지만, 경찰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경찰의 얼굴에는 '뻔한 수작'이라는 비웃음이 선명했다.


"신분 확인이 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경고합니다." 경찰의 단호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류세린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침내 이성적인 판단을 멈추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 살인자. 그리고 뇌사. 모든 것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죽어가는 순간의 말 없는 그림자가 그녀의 눈앞을 스쳤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 속 차가운 불꽃은 이제 막을 수 없는 복수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잠깐이면 된다니까!" 류세린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경찰들이 그녀의 뒤적거리는 손에 신경 쓰는 틈을 노려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오직 하나, 병실 슬라이딩 자동문의 열림 버튼이었다. 그녀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정확하게 버튼에 닿았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병실 문이 '스르륵', 불안할 정도로 느리게 아주 작은 틈을 열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예상치 못한 류세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훈련된 그들의 몸은 짧은 순간의 당황을 이겨내고 곧바로 움직였다. 거친 손길이 그녀의 양팔을 뒤로 꺾어 붙였다. 류세린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끌려갔지만, 그녀의 시선은 끈질기게, 열린 문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그 좁고 짧은 틈으로 병실 안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남자가 생명 유지 장치에 기대어 힘겹게, 거의 들릴 듯 말 듯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몸. 하지만 가늘게,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 경찰서에서 본 희미한 사진 속, 뇌사 상태라고 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를 보는 순간, 류세린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복수심이 화산처럼 터져 나오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 해!" 그녀는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놓으란 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야!" 그녀의 격렬한 절규가 중환자 병동의 차가운 고요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경찰들은 그녀의 몸부림을 완벽하게 제압하며 병실 문에서 멀리 끌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저항하는 몸부림 속에서도, 경찰의 넓은 어깨너머로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간절하고 절박한 그녀의 눈에 흐릿하게 보였던 병실 문 옆 환자 정보지가 마침내 또렷하게 들어왔다.


12 병상 / 이안(男)

신경외과(Neurosurgery)

주치의: 민상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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