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위로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그 검푸른 하늘은 마치 이성으로는 해명 불가능한 거대한 진실을 감추려는 듯,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법원 앞은 이미 새벽부터 아수라장이었다. 각종 언론사의 기자들이 초조하게 삼각대와 카메라를 세워두고 운명의 재판을 기다렸다. 수많은 마이크와 렌즈가 번쩍였고, 전 국민의 이목이 한데 집중된 사건이었다.
이윽고, 굉음을 내는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법원 정문에 미끄러져 들어섰다. 킬힐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흑색 선글라스를 낀 류세린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길고 붉은 머리카락은 비바람 속에서도 거침없이 흩날리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류세린 박사님! 오늘 재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뇌사 상태의 범인에 대한 입장은요?"
"돌아가신 부친께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십니까?"
플래시 세례와 함께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도 류세린은 아무런 대답도, 표정 변화도 없이 인파를 헤치고 법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그 새까만 눈동자 아래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의 혼란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법정 안의 공기는 바깥의 빗물처럼 축축하고 무거웠다. 엄숙한 적막이 무거운 바위처럼 법정 전체를 짓눌렀다. 증거 자료를 펼쳐둔 채 검사석에 앉은 서울지방검찰청 소속 베테랑 검사는 입가에 연신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피고 측 국선 변호인은 초조하게 땀이 밴 손으로 법전의 모서리만 쓸어내렸다. 그의 초점 잃은 눈빛은 이미 패배를 직감한 듯 절망감에 물들어 있었다. 배심원단은 전면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처음에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 기이한 재판의 전말을 엿들으려는 듯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들의 시선은 이 재판이 얼마나 이례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윽고 판사가 법봉을 세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그 단호한 소리는 고요한 법정의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성동지원 2035 형사합의 112호 살인사건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인석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재판정 전면에 설치된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한 남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수많은 의료 장비가 거미줄처럼 그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뇌파 감시기, 인공호흡기, 심전도 모니터. 창백한 얼굴 위로 가늘게 움직이는 가슴이, 그가 생명유지장치에 의지해 간신히 호흡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크린 속 남자는 명백히 뇌사 상태의 환자였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류세린은 그 스크린 속 남자를 경멸에 찬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억눌린 슬픔과 함께, 뒤틀린 복수심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이안. 그의 얼굴에는 어떤 악의 그림자나 잔혹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류세린의 시선은 이미 그를 아버지의 살인자로 낙인찍고 있었다.
"피고인 이안은, 피해자 류현수 박사를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검사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배심원단에게 향했다. 그의 목소리는 법정 전체에 울려 퍼지며, 배심원단의 흔들리는 확신에 쐐기를 박았다.
"재판장님, 배심원 여러분. 본 사건의 증거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검사는 손에 들린 투명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그 안에는 은색 칼날이 번뜩이는 수술용 메스가 담겨 있었다. 손잡이에는 혈흔과 함께 선명한 지문이 묻어 있었다. "이것은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입니다. 날카로운 칼날에서는 피해자의 혈흔이 다량 검출되었고, 손잡이에서는 피고인 이안의 지문이 100% 명확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증거 제1호로 제출합니다." 검사는 단호한 표정으로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추호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 듯했다.
다음으로 거대한 스크린에 범죄 현장 사진과 고해상도 CCTV 영상이 재생되었다. 검사는 영상을 잠시 멈춘 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범죄 현장에 남겨진 피고인의 족적,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해자 시냅스 코어 내부에 설치된 CCTV 영상은 피고인 이안이 어떻게 이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명명백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살해 장면을 시청하겠습니다."
화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피고인 이안으로 보이는 남성이 영상에 등장했다. 그의 눈은 감정 없이 차가웠고, 발걸음은 숙련된 암살자처럼 조용하고 빨랐다. 그는 류현수 소장이 의자에 앉아 모든 신경을 연구에 쏟아붓고 있는 연구실로 들어섰다. 류 소장은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알지 못한 채, 오직 연구에만 깊이 빠져 있었다. 남성은 그렇게 방심한 류 소장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섰다. 그리고는 섬광처럼 은색 칼날을 치켜들었다. 칼날이 번뜩였다. 그의 손목이 류현수 박사의 무방비한 목을 향해 정확히 그어지려는 찰나, 검사의 손짓과 함께 영상이 멈췄다.
법정에는 일순 공포에 질린 짧은 비명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류세린은 차마 그 끔찍한 장면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수천 개의 칼날로 난도질당한 듯 아려왔고, 비명을 지르는 피가 온몸의 세포들을 태우는 듯했다. 방청석 곳곳에서는 충격에 휩싸인 배심원들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모든 과학수사 결과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피고인이 범인임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검사는 수려한 언변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의혹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확고한 자신감이 넘쳤다.
이어 국선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고민과 좌절감이 뚜렷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저는 본 검사의 논증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피고인 이안은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여기 해당 담당 의사의 소견서와 뇌파 기록이 증거 제11호로 제출되었습니다. 뇌사 상태는 심장만 뛰고 있을 뿐, 모든 뇌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걷고, 문을 열고, 심지어 살인과 같은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범죄를 저지를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뇌사 환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의학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증거가 피고인을 가리키지만, 저는 이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배후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법정에는 일순 혼란스러운 술렁임이 번졌다. 몇몇 배심원의 얼굴에는 이성적인 의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검사는 피고 측 변호인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피고 측 변호인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 터무니없는 비과학적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법은 증거제일의 원칙을 따릅니다. 검찰이 제시한 지문, 족적, 그리고 가장 확실한 영상 증거는 피고인이 이 사건의 유일한 범인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피고 측의 주장은 합리적 의심을 가장한 도피에 불과합니다.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류현수 박사는 우리나라 뇌과학의 미래였습니다. 그의 사망은 최소 10년 이상의 퇴보를 가져왔습니다. 이 잔혹한 범죄는 단지 한 개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짓밟은 것입니다." 검사는 시선을 방청석으로 돌렸다.
그의 손가락은 류세린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미동도 없었지만, 떨리는 어깨는 그녀가 견디는 고통의 깊이를 짐작게 했다.
"저곳에 앉아 계신 고인의 유족 류세린 박사님은 이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계십니다. 이 잔혹한 살인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여, 법의 엄중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검사의 목소리는 동정심과 분노를 자극하며 배심원단의 심리를 압박했다. 일순 흔들리던 배심원들의 눈빛에는 다시금 명백한 분노와 유죄의 확신이 차올랐다.
국선 변호인은 이미 재판의 승부가 기울었음을 직감했다. 명백한 증거와 검사의 감정적 호소 앞에서 그의 주장은 얇은 얼음장처럼 위태로웠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마지막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배심원 여러분. 피고인의 뇌사 상태는 그 자체로 비극이며, 설사 그가 범인이라 할지라도… 법의 가장 큰 원칙 중 하나는 인간의 생명 존중입니다. 부디 이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시어 현명한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패배가 짙게 깔려 있었다.
배심원단은 짧은 숙고 끝에 만장일치로 '유죄'를 선언했다. 이어진 양형 심리에서, 그들은 이 사건의 중대성과 피해자의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 최종적으로 피고인에게 '사형'을 결정했다. 판사 또한 검찰이 제시한 너무나도 명확한 증거들과 국민적 관심, 그리고 여론이 이안의 사형 판결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다른 판결이 없음에 동의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판사에게 집중되었다.
판사는 무거운 법전 위로 손을 얹었다. 그의 시선은 홀로그램 스크린 속 뇌사 상태의 피고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피고인, 성명 이안. 피고인은 대한민국 형법 제250조 제1항 살인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본 법정은 검찰이 제시한 모든 증거와 피고 측 변호인의 주장을 심도 깊게 검토했습니다. 피고인의 범행 당시 심신상실 상태를 인정할 여지가 있으나, 피고인의 육체적 행위가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음이 명백하며, 그 범죄 행위가 지극히 잔혹하고 사회 전체에 미친 해악이 지대함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판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그 무게는 법정 전체를 압도했다.
"따라서 본 법정은 사회 정의 실현 및 유사 범죄 예방을 위해 극형을 선고함이 마땅하다고 판단합니다. 피고인 이안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피고인은 본 판결에 대하여 7일 이내 항소할 수 있습니다."
차가운 판결이 법정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류세린은 스크린 속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텅 빈 얼굴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희미하게 숨만 쉬고 있었다. 그녀의 복수심은 차가운 법정의 판결로 해소되는 대신, 무엇인지 모를 기이하고 섬뜩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성은 외쳤다. 과연 이것이 진실의 전부일까? 법봉 소리가 끝난 법정의 침묵은, 새로운 미스터리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