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멈춤이 필요한 순간
그렇게 고민의 시간을 가지며 맞이한 일요일 아침. 와이프가 눈을 맞추며 넌지시 말했다.
"이렇게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
그때 느껴지는 묘한 느낌. 지금 함께 있는 순간이 좋다는 걸까? 아니면 엄마 혼자서 견뎌내는 시간들이 너무 힘들다는 걸까? 아마 2가지 다였을 거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는데, 그 장면이 계속 눈에 아른거린다.
로맨틱 라이프
러블리 패밀리
글로벌 챌린저
탑다운 뷰
그래.. 나는 이미 방향을 알고 있었지! 러블리 패밀리,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건 바로 그거였다. 글로벌 챌린저와 탑다운 뷰는, 잠시 접어두고 다시 꺼내면 되는 것들이었다.
가족이라는 나무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유일하고도 확실한 일 같았다. 우리 가족에게 다가 온 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그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며 함께 웃으며 헤쳐나가는게 내가 생각했던 로맨틱한 삶 아닐까? 이렇게 판단하고 나니 이제 선택이 두렵지 않았다.
끌려다니며 어쩔 수 없이 내리는 결정이 아닌, 진짜 어른이자 아빠로서 "나는 멈추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휴직계를 꺼내 들자니 나의 부재로 인한 공백을 조직에게 떠 넘기는 것 같아 괴로웠다. 팀원들에게, 그리고 팀장님, 상무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내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정중하게 도움을 부탁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먼저 팀장님께, 상사가 아닌 회사 선배로 솔직히 상의드렸다. 아무래도 치료기간을 고려했을 때 주재원은 포기해야 할 것 같고, 진급여부에 상관없이 휴직을 하는 게 맞는 선택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여쭤봤다. 1년간 항상 나를 지지해 주시던 팀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강했지만, 회사 선배이기도 하기에 진심으로 여쭤보았다. 다행히 많이 이해해 주셨고, 한마디 더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다.
우리 모두 행복하려고 회사 다니는 거잖아.
회사에서 너무 중요한 시기이긴 하니까
어떤 방식이든 가족을 위한 길을 선택해.
너무 감사했고, 그 순간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상무님도, 필요한 만큼 가족을 위해 시간을 가지라고 응원해 주셨다. 그렇게 팀원, 팀장님, 실장님, 회사 지인들께 인사를 드리고 난 우리 가족에게 달려갔다. 가은이의 치료가 정말 잘 된다는 기준으로 예상되는 기간은 9개월. 그건 단순한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골든타임이었다.
내 나이 40이 되는 시점,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을 했다. 이보다 중요한 시기는 없잖아? 난 이미 패를 던졌고, 그리고 잊고 있던 내 인생의 나침반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래, 할 거면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
이제 더 이상은 망설이지 않고, 회사 생활에 작은 쉼표를 찍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9개월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