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력이 있다면 꼭이요
녹내장이라는 진단을 받고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많이 한 일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익숙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어려 동네 안을 수시로 왔다리 갔다리 하고 한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상황들이 매일 반복됐기에 가능했다.
“가족 모두 건강하죠? 전 녹내장이래요. 백내장 아니고 녹내장이요. 시신경이 죽어가는 병이요. 완치가 없대요. 노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인데 전 이십 대부터 진행됐다 하네요? 진짜 어이없죠? 일상생활에서 크게 불편한 건 없어요. 평생 안약 넣고 살아가야 하고, 따로 영양제만 챙겨 먹어요.”
내가 떠벌리고 싶은 말은 딱 이 정도였다. 누가 묻지 않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느닷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심지어 난 밝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기분 좋게 광고하고 다녔다. 사람들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기억나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들에겐 금방 잊어버릴 남의 이야기들 중 하나일 테니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듣기 싫어할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고 다녔다. 질릴 때까지 그러고 싶었다. 가만히 꾹꾹 누를 수도 없었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 상황을 가만히 두기엔 끓어 넘칠 것 같은 복잡한 속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비워내고 싶었다. 언젠가 뜻밖의 곳에서 엉뚱하게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안전한 곳에 조금씩 내려놓고 싶었다. 녹내장이라는 단어를 잘게 잘게 부수어 흩뿌리는 방법이다. 단어가 지겨워지도록, 무한 반복해서 입이 아프도록, 밖으로 내보내자. 실제로, 말하고 나면 묵직한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단, 부모님에겐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도 낯선 질병이기도 했고, 자식이 부모에게도 없는 질병을 먼저 가지고 있다는 것, 딸자식의 건강이 성치 않다는 소식은 최대한 오래오래 비밀로 묻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잡다한 감정 싹 배제하고 생각해 봐도, 부모님에게 말한다고 상황이 바뀔 것도 없다. 혹여나 나중에 들키더라도 얼마 전에 알게 됐다고 둘러대면 된다. 나에게 녹내장이 있다는 사실은 부모님의 잔소리 한 줄을 더 덧붙일 일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을 때에도 녹내장은 단연 주요한 이야기 소재였다. 대부분에겐 흘려들을 내용이지만, 몇몇은 꽤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안경을 낀 사람, 혹은 요 근래 노안을 느끼고 눈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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