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탄 소년> 때로는 '그냥'이 옳다

2025.9 | 영화 옛작 리뷰 #1

by 안형섭

**이 게시글에는 영화 <자전거 탄 소년> (2011)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 중 혹시라도 영화를 보실 계획이 있으시면 주의 바랍니다.




'복세편살'이라는 단어가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의 줄임말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유쾌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공감을 얻은 이유는 아마도 "세상을 사는 것이 복잡하다"는 공통된 의견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현대 사회는 이전까지의 사회보다 여러 의미로 복잡합니다. 단순히 사회 구조가 복잡한 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의식과 도덕적 기준에 이르기까지 복잡합니다. 적어도 이전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기준이라는 것이 늘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도래는 흔히 '진리'라고 불리던(종교적인 진리이든, 혹은 사실이라고 불리는 것이든) 공동의 기준을 해체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개개인의 삶이 그야말로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물론 이렇게 철학적인 접근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직관적으로도 복잡하긴 합니다. 일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삶을 사는 것도 단순한 생각으로 살기란 쉽지 않죠.


자전거 탄 소년 | 2011 | 다르덴 형제(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87분 | 12세 이상 관람가


오늘 리뷰하려는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주인공인 소년 '시릴'의 삶도 복잡합니다. 영화 서두에서 그는 수화기를 불안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 전화를 받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말이죠. 시릴의 아버지는 그를 보육원에 맡겨두고는 사라졌습니다. 시릴의 자전거도 공과금을 내려고 팔아버린 듯합니다. 어린 소년에게 이런 삶은 너무도 설명할 것이 많아 복잡하고 가혹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뻔히 읽어낼 수 있는 상황(곧 시릴의 아버지가 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시릴을 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읽어내기엔 시릴은 아직 복잡한 세상을 잘 알지 못하는 것도 같습니다.


영화는 이런 시릴의 성장담을 그려내는 동시에, 우리가 복잡한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장 완벽한 성장영화라는 평을 듣는 영화, 이따금씩 배경으로 나오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2악장이 인상적인 영화인 <자전거 탄 소년>을 리뷰해보려 합니다.




성장담을 조심스레 쫓는 카메라워크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이미 칸 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하며 잘 알려졌습니다. 그들의 영화의 특징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약간은 폭력적인 일이겠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어법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이들 형제는 다큐멘터리도 여러 편 촬영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자전거 탄 소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핸드헬드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 속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카메라는 인물들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소년의 좌절과 절망감을 카메라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부감으로 멀리서만 관조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적당한 거리감이 다르덴 형제의 장점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소년의 삶을 관찰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 아닌 연민과 애정의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시릴은 단순하게 일방향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만다의 사랑에 감화되기보다는 오히려 동네 형을 따라 방황으로 들어섭니다. 약간은 일진일퇴(back and forth)를 반복하는 그의 성장 방식은 <데미안>의 싱클레어와도 닮아있습니다. 흔히들 싱클레어의 성장 곡선을 상승하는 나선형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데미안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성장과 기존 모습으로의 회귀를 경험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조금씩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미 성장한 싱클레어는 성장하기 전의 싱클레어와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습니다. <데미안>의 명문장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처럼 이미 알에서 나온 새는 결코 알로 돌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싱클레어의, 또 시릴의 이런 성장담이 저에게는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런 성장곡선에 따라 시릴은 세상의 여러 굴곡에 부딪히면서 고통스럽게, 그러나 선명하게 성장합니다. 특히나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지막 장면이 아마 그 증거일 것입니다. 자신의 오점에서 벗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길을 향해 새롭게 나아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어째선지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애정 어린 카메라의 시선으로 소년을 보다 보니 정이 든 것일까요?


웨스를 통해 우리는 스크린 밖으로 영화를 확장하게 됩니다.

개인에서 사회의 이야기로


시릴의 주변 인물 중 인상 깊은 사람은 크게 둘입니다. 먼저 시릴과 비슷한 인생사를 겪은 웨스입니다. 어쩌면 시릴의 인생선배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잘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여러 인물이 그렇듯, 엑스트라처럼 카메라 밖에 있다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시릴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이 지점부터 영화는 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사회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왜냐하면 영화에 나오지 않던 웨스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시릴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우리가 보는 스크린 밖(더 정확히는 영화 밖)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관객들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웨스의 모습이 더 현실적인 시릴의 미래가 될 수 있음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점부터 영화는 시릴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는 동시에 사회 전반의 이야기로 변합니다. 영화 밖의 시릴과 웨스가 우리 주위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영화관 밖의 삶으로 관객들을 다시 집중시키고, 우리 주변의 '시릴'들에게로 시선이 향하게 합니다. 그냥 지나가는 시선, 냉정한 시선이 아닌, 이 영화의 카메라처럼 온정적인 시선으로 말이죠.

'그냥'이 인간성(Humanism)의 발현인 이유

사만다의 모습에서 가장 근원적인 휴머니즘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사만다의 위치에 놓습니다. 즉, 내가 사만다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사만다는 어떤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시릴을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녀가 처음 시릴을 만나는 장면을 돌이켜보면,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는 시릴에게도 그녀가 낯선 사람(Nobody=아무도 아닌 사람)이자, 병원의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무작위로. 혹은 우연으로 (혹은 필연으로) 사만다는 시릴의 손에 잡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사만다가 소년을 기억하고 위탁모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 그림은 현실에선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만다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릴을 아끼고, 돕고, 선택합니다. 머릿속에서 '왜'라는 질문이 계속 들 정도로 그녀는 헌신적입니다. 으레 이런 경우엔 그녀에게 아끼던 아들이 있었다던지, 무언가 유년기의 아픔이 있었다던지의 '특별'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릴이 그녀에게 물었을 때, 사만다는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 왜 저를 맡았어요?
- 네가 원했잖아.
- 그러니까 왜 허락했어요?
- 글쎄...

그녀에게는 시릴을 맡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만다가 말한 유일한 이유는 "시릴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소년이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생각날 정도로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쉽게 적용되기 어려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도와달라 해서 '그냥' 도와주는 이런 모습은 쿨한 모습을 넘어서서 가장 근본적인 휴머니즘적 태도로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를 사만다의 자리에 다시 세워봅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해서 요청한 것을 아무런 계산이나 판단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도운 것이 언제인지 돌이켜봅니다. 남을 도우면서 제 이익을 취하거나 실은 나를 위한 것이기에 돕지는 않았는지. 혹은 복잡한 철학적 논의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저의 선함을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대답이 가장 선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선한 마음 하나만큼은 복잡하지 않은, 순수하고 간단한 답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