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의 남자와 함께하는 작가 생활
요즘 나는 칩거 생활 중이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다녀온 이후, 장 보러 1번, 스타벅스 디카페인 커피 사러 1번 나갔을 뿐, 3주째 나가지 않고 있다. 이 칩거 생활의 이유는 뜨거운 태양 때문이다. 머리 위에서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것과 나의 통증이 무슨 의학적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쬐는 순간 아팠던 머리가 더욱 심하게 속수무책으로 아파서 외출은 물론, 의사 선생님이 운동은 꼭 하라고 조언하셔서 하고 있던 산책까지도 피하고 있다. 원래 우리 강아지 하루가 있었을 때는 밤에라도 산책을 꼭 나가곤 했는데, 하루를 신랑집에 두고 온 이후로는 밤 산책도 그다지 당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칩거 생활의 장점이 있다. 약간 드라마 속에서 보던 작가 느낌이 있달까?
지난 7월 말 브런치 작가가 된 후, 나는 매일을 글 쓰거나 다듬고 있었는데, 이 칩거 생활이 묘하게 작가의 생활과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칩거 생활을 위해서는 일단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유니폼은 얼마 전에 산 체크무늬 반팔 파자마이다. 톤은 아주 연한 레몬색과 하늘색이 교차하는 파스텔톤으로 골랐다. 그 이유는 나의 퍼스널 컬러와 잘 맞는 톤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집에 있기에 화장할 필요성을 못 느껴 화장을 하지 않다 보니, 반드시 예쁜 톤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기분이 좋다. 드라마에서처럼 안경을 써주면 더욱 작가 느낌 나고 좋겠지만, 안경도 신랑집에 두고 왔기 때문에 없는 상태로 그럭저럭 글을 쓰며 지낸다.
나의 성격상, 혼자라면 이 칩거 생활이 너무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든든한 칩거 메이트가 계시기에 즐겁다. 칩거 메이트는 일명 ' 루틴의 남자' 나의 아빠 시다. 아빠께서는 여름 피서하시러 우리 집에 오시겠다고 하셔서 오빠가 모시고 왔다.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나와 함께 지내고 싶으셔서 오신 거라는 걸 안다. 물론 절약 정신이 투철하시기에 피서하시러 오셨다는 말도 어느 정도 진실이다. 에어컨을 함께 쐬면 절약되기 때문이다.
아흔을 바라보시는 연세답지 않으시게 스마트폰을 잘 다루시고, 최근에는 ai와 음성 대화하는 법까지 배우셔서 즐기고 계시는 아빠 시지만, 그런 아빠는 사실은 텔레비전과 핸드폰 없이는 사셔도 시계 없이는 못 사시는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이시는 '루틴'의 남자시다. 예를 들면, 식사하시기 30분 전에는 반드시 물을 드시고 원래 정해진 시간보다 몇 분이라도 늦게 물을 드셨다면 식사도 그만큼 늦게 드시는 식이다. 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시간 동안 반드시 허리 운동을 하신다. 그 시간에는 뭘 같이 하시자고 여쭤봐도 안된다고 거절하시고 반드시 운동만 하신다. 그래서 덩달아서 무계획형인 나에게도 약간의 루틴이 생겼다. 밥 하는 일, 약간의 반찬을 하는 일과, 성경 낭독, 글쓰기, 차 한잔 하는 일, 그리고 아빠와 약간의 대화 등이 그것이다.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글을 쓰다 보니 하루하루가 드라마 속 작가처럼 진짜 작가가 된 듯 행복하다. 하지만 이 행복은 무엇보다 나의 칩거 메이트이신 아빠가 계셔서 가능한 일이다. 아흔을 바라보시는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참 감사하다.
그러고 보면 병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주변에 나를 사랑해 주고 있는 사람이 늘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하고, 때로는 처음 보는 낯선 이들(예를 들면, 의사 선생님들이나 간호사 선생님.)의 친절과 호의를 받게 해주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게다가 이렇게 아빠와 신랑과 우리 하루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고, 늘 생각만 하던 파리 여행까지 떠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빠진 한 가지, 동경만 해왔을 뿐 내가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하고 미루어 왔던 작가 생활까지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보자면 병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