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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말 걸던 30대 그 아저씨

나보다 어린 그 아저씨의 애정 어린 참견

by 커피중독자의하루
그 시절의 캐나다, 다 같이 놀러 가서.


이렇게 혼자 아닌 듯 혼자인 여행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갓 성인이 된 시골 아가씨인 내가 이런 낯선 환경에 홀로 놓여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해외여행 한 번쯤은 다 가봐서 보고 들은 지식이 많고, 그걸로도 부족할 땐 스마트폰으로 어느 때나 검색 가능한 시절이 아니었다. 텔레비전 채널도 3개만 나오고 그마저도 일정 시간 이후에는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시절에는 7시 30분부터 23시까지 학교에 있었으니, 혹시 텔레비전에서 무언가를 말해줬어도 나는 접하기가 매우 힘든 환경이었다. (혹시 또 모르겠다. 도시 사람들은 나와는 달리 이런 것들을 자주 접했는지도.) 게다가 아빠께서는 내가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위 형제인 언니, 오빠가 서울에 있는 외삼촌댁에 갈 때조차도, 너는 엄마, 아빠 외로우니 집에 남아 있으라고 하셔서 서울도 거의 못 가본 나였다. 흑백폰이 있긴 했지만, 문자나 전화정도하는 게 다였을 때였다. 궁금한 게 있을 땐, 캐나다 관광책자에 의지해서 궁금증을 해소하고, 캐나다에서 어딜 가려면 지도책자를 들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난 언니가 함께 하기에 굳이 관광책자도 사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렇게 낯선 상황에 홀로 놓인 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나에게는 언니가 말해준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금방 적응했다.
혼자인 건 혼자인 나름대로의 '무엇'이 있었다. 즐거움이라 표현하기엔 즐기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고, 낯설고 고통스럽다 하기엔 무언가 에너지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기내에서 영화도 틀어주었지만, 나는 준비해 온 책을 읽었다.

앞서, 나는 씩씩하게 화장실에 잘 갔다고 했지만 실은 작은 어려움이 있었다. 좌석벨트 푸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버스의 안전벨트와 다르게 버튼식으로 누르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몇 번의 시도를 하고 있는데 내 옆자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그거 이렇게 하는 거야."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내가 앉은 줄에는 총 5명이 나란히 있었지만 한국인은 그 아저씨뿐이었다. 양쪽 창가 자리 두 명씩을 포함하여 근처에 거의가 외국인이었다.

기내식이 나왔다. 두 가지 중 고르라고 했는데 나는 피쉬계열을 골랐다. 그 메뉴는 외국인들이 대부분 고르고 있었는데 그때 눈치챘어야 한다. 외국인 입맛에 맞춘 것이라는 걸. 집에서 외식이라고는 짜장, 짬뽕과 페리카나 양념치킨, 언니가 어릴 때 사줬던 돈가스 정도가 다인 내 입맛에 기내식으로 제공한 피쉬요리는 너무 느끼하고 맛이 없었다. 몇 번 먹다 남기려고 하자 옆자리 아저씨가 또 말을 걸었다.


"그거 남기지 마, 다 먹어야지."
"너무 느끼해서 못 먹겠어요"
"그래도 다 먹어야지, 현지 가면 입맛에 안 맞는 음식들 더 많을 텐데 벌써 안 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잘 먹어야 잘 적응하지. 그리고 이것도 다 티켓값에 포함인 건데 다 먹어야지."

참견하는 아저씨에게 짜증이 났다.

어쨌든 밥을 다 먹으라는 조언에 따라 두어 숟갈 더 먹었지만 도저히 먹히지 않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어렴풋이 그분의 외모가 기억이 난다. 짧게 자른 머리에 안경을 쓴 살짝 까무잡잡한 얼굴이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지적인 인상의 아저씨였다. 그래도 밥을 남기자 갑자기 본인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나는 36살인데..."뒤에 이야기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대략 한국에서의 삶을 접고 캐나다에 가시는 것 같았다. 일행이 있는 나였지만 혼자 온 사람으로 보였는지 중간중간 조언들을 하셨던 것 같다. 그때는 선진국 캐나다에 이민 간다는 얘기에 나와 다른 부자의 이야기구나 싶어 부럽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분도 IMF 여파에 잘되던 사업을 접고, 캐나다에 도피하듯 가게 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도 지금도 경제적인 것은 잘 모르는 내가 이렇게 추측해 본 이유는, 그때 그 아저씨의 표정이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 찡그린 듯, 그러나 평상심으로 감추고자 하는 표정이었다.

지금의 36살을 바라보면, 한창 피어나는 청년들이다. 나보다 한참 어린 청년. 하지만 그때의 내게는 36살은 한참 어른인 '아저씨'로 다가왔다. 밥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참견들이 고맙기도 하면서 귀찮았는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외국인들만 가득한 그곳에서 홀로 온 한국인이라는 동질감과 (사실 나에게는 일행이 그 비행기 안에 있었지만.)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성인이 홀로 앉아 있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건넨 애정 어린 참견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그 아저씨에게 젊은 청년이 홀로 이민을 가는 용기에 박수 한 번을,
그렇게 가는 와중에도, 타인을 모른 척하지 않고 애정 어린 참견을 한 용기에 또 박수 한 번을.(파리 여행에서 나는 다정함도 용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앳된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 주신 그 마음에 감사드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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