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 인턴 6주차 때의 기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

by 지오

시간을 거슬러 몇 주 전의 이야기다. 종종 전에 써둔 글들을 옮겨둘 생각이다.



매니저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매주 수요일, 캘린더에 들어서 있는 일정이지만, 딱딱하지 않은 평범한 대화에 가깝다. 온보딩 얘기만 하다 처음으로 일상적인 얘기를 시작했다.

“How did you get into Computer Science, or software engineering?”.

정석적인 질문이다. 내가 개발자와 커피챗을 할 때마다 묻는 질문이다. 진심으로 궁금하다.


케빈의 과거는 무난했다. 물리와 수학을 고등학교 때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려 했다. 여러 공대 전공 중 우연찮게 CS를 선택했고, 물 흐르듯 그 길로 접어들었다.


내 얘기도 했다. 시작은 엄마였다. ‘코딩이 미래다’라는 말과 함께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를 대치동의 코딩 학원에 보냈다. 그곳에서 C++ 문법을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이 C++를 타이핑하고 있었다는 게 어딘가 기묘하다.

그렇게 코딩을 시작했다. 잘하니까 계속했고, 오래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고등학교 4학년 직전까지는 알고리즘 문제를 주로 풀었고, 개발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파이썬도 간신히 다룰 줄 아는 정도였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올 무렵,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명확했다. 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이공계 분야를 직접 경험하며, 실험이나 리서치보다는 소프트웨어 쪽이 잘 맞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코딩은 지겹지 않았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그러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이어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선택은 마치 정해진 수순 같았다. 코딩을 했고, 잘했기 때문에 계속했고,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다. 중국인 친구들은 수학과 화학에 몰두했지만, 난 코딩을 계속했다. 다른 길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내신을 챙기고, 수시를 준비하고, 컴퓨터공학과를 썼겠지.

결국 나도 꽤 정석적인, 뻔한 학생이었다.


나쁜 건 아니다. “꿈을 찾는 어린이” 같은 거창한 타이틀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내 케이스가 가장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면서, 그들이 꿈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야”라는 이상적인 교육론과 대학교 명성에 집중하는 주입식 교육의 적당한 타협점이다. 그 결과물이 내가 아닐까? 현대 사회에서 등장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 루트를 밟은 사람이 아닐까.


요즘 다시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다. 테슬라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개발자 일을 하면서, 이 일을 졸업하고도 평생 할 자신이 있는지. 내 다음 목표는 무엇인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코딩, 컴퓨터 과학, 소프트웨어 개발은 결국 행위이며, 전공, 그리고 직업이다. 본질적인 “흥미”나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난 롤을 꽤 오랫동안 플레이했다. 나한테 롤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대신 “왜 롤을 하냐”라고 물으면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다. 보이는 것에 비해 더 생각하고 머리를 쓰는 행위가 많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키보드 마우스 딸깍 딸깍하는 피지컬을 요구한 게임이라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머리를 쓰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럼 난 “롤”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머리를 쓰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후자에 가깝다.


내가 좋아하는 행위들을 나열하다 보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난 코딩과 요리를 좋아한다. 두 가지의 가장 직관적인 공통점으로는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에 있다. 기존에 있는 것을 수정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제 각각을 왜 좋아하는지를 관찰해 보자. 난 특히나 읽기 좋은 코드에 집착한다. 복잡하고 산만한 조건문과 반복문들을 하나의 읽기 쉬운 구문으로 축약하는 행위. 내가 요리 중에 파인다이닝 요리를 따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창작 메뉴인 ‘겨울잠 대구’는, 콘소메 생선 육수에 팬 프라잉 한 대구와 무 퓌레를 올린 디쉬이다. 이 음식을 먹은 손님은 그저 ‘맛있는 대구’라고 인식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겨울에 어울리는 포근한 느낌, 적절한 산미, 생선의 부드러운 식감, 무의 달큼함, 따뜻한 육수의 밸런스를 느끼게 된다. 대놓고 보이는 것보다 은근한 게 보이는 걸 좋아한다. 그걸 직접 숨기는 걸 참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대놓고 보이는 것보다 잘 안 보이는 디테일을 숨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 그리고 그런 작품을 창작해 대중이 경험하게 하는 것. 이런 요소를 중점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직관적으로 읽히되, 그 안에 숨겨진 층위가 있는 글. 대놓고 설명하지 않아도, 읽는 이가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문장. 어쩌면 글쓰기야말로 내가 오래도록 좋아해 온 방식,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지 않는 디테일을 섬세하게 감추는 가장 오래된 창작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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