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뜨기 전에, 레이나를 떠나
아직 어둠이 채 물러가지 않은 새벽,
우리는 조용히 레이나를 떠났다.
여왕에 다리 앞에서 사진 한짱 찍고, [참고로 11세기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다리로 여왕이 님 순례객들이 강을 쉽게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
길 위에는 바람 소리와 자전거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동쪽 하늘이 조금씩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때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속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새로운 하루가 열리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삶을 다시 살아있게 만들었다.
순례길은 금세 붉은 흙으로 변했고, 길 옆으로는 포도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잎사귀 사이로 매달린 포도송이들이 이슬에 젖어 반짝였다.
그 보랏빛 열매는 아직 덜 익은 것도 있었고, 이미 당도를 머금은 것도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사람의 인생 같았다.
어떤 이는 아직 준비 중이고, 어떤 이는 세월의 햇살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달리며 들리는 건 오직 새소리와 내 숨소리뿐이었다.
해가 떠오르자 포도밭 위로 황금빛이 번졌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곳까지 왜 와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멀리 있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 있는 몸으로 느끼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한참을 달린 끝에 드디어 파란 표지판이 나타났다.
“Camino de Santiago” — 산티아고 순례길.
노란 조개 문양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 표식은 피로한 몸에게 “잘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길 위에서 누군가의 격려 대신 이 작은 표지 하나가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인사였다.
잠시 후, 돌로 쌓인 건물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이 바로 순례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곳, 보데가스 이라체(Bodegas Irache).
이곳에는 ‘와인 분수(Fuente del Vino)’가 있다.
한쪽에서는 시원한 물이, 다른 한쪽에서는 붉은 와인이 흐르고 있었다.
“순례자여, 목을 축이고 다시 나아가라.”
벽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났다.
컵에 따라 마신 한 모금의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길 위의 축복이었다.
이곳 성당에서 무료로 와인과 물은 순례자에겐 생명수인 것이다.
순례자 들은 이곳에서 와인 한 방울 맛을 보기 위하여 새벽을 빨리 준비하는 순례자들도 많다.
나는 운이 참으로 좋은 놈인 것 같다.
해가 비추며 돌담에 드리운 내 그림자도, 그 순간만큼은 술기운처럼 따뜻했다.
포도밭 사이를 다시 달리며 작은 마을로 향했다.
카페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한 잔은 진하고 쌉쌀했다.
피로한 몸을 깨우는 그 맛 속에는,
스페인의 땅이 지닌 햇살과 흙, 그리고 사람들의 인심이 녹아 있었다.
하루가 저물 무렵, 나는 돌다리 위에 섰다.
멀리 산등성이 위로 풍력발전기가 돌고,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갔다.
‘오늘도 참 잘 달렸다.’
누구에게 들려주지도 않을 그 한마디가
내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기도로 번져갔다.
레이나에서 이라체까지,
짧지만 긴 하루의 여정은 결국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길의 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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