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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자전거여행 25

“가리비를 철의 십자가에 걸었다”,

by 이쁜이 아빠

아스토르가를 지나 본격적으로 산지를 향해 오르기 시작하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메세타의 평화를 뒤로하고 해발이 높아질수록 바람은 더 차갑고 단단하게 얼굴을 스쳤다. 길 양옆은 점점 숲으로 채워졌고, 건조한 흙과 솔향이 섞인 냄새는 오래전부터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순례길의 상징 같은 곳.
크루스 데 페로(Cruz de Ferro)에 도착했다.

길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다란 나무기둥, 그 꼭대기에 얹힌 작은 십자가. 겉으로 보면 단순한 구조물 같지만, 그 앞에 서면 누구나 한 번쯤 숨을 고르게 된다.
이곳에는 세상 모든 순례자가 각자의 마음을 내려놓고 간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기둥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의 사진을, 누군가는 오래된 팔찌를, 또 누군가는 기도문이 적힌 쪽지를 남기고 갔다. 어떤 것은 색이 바래 있었고, 어떤 것은 방금 걸린 것처럼 아직도 선명했다.
마치 이곳이 거대한 ‘인생의 보관함’처럼 느껴졌다.

나도 자전거를 세우고 천천히 기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배낭에서 내가 이 길을 걸으며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 온 가리비를 꺼냈다. 이 조개껍데기는 순례길의 상징이자, 나 자신에게 주는 작은 약속 같은 존재였다.
나는 조심스레 가리비를 기둥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떨렸다.
“나도 이 길의 일부였구나.”
그런 감정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십자가 아래에는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돌멩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도 그 위에 작은 돌 하나를 올려놓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길을 오기까지의 내 삶, 가족,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떠올리며 짧지만 깊은 기도를 올렸다.
완벽한 표현은 아니지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작은 자갈이 깔린 급경사는 자전거 타이어를 부드럽게 흔들었고, 순간의 방심이 전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두려움을 잊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비에르소 계곡은 마치 끝이 없는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고요하고 넓고,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고 자전거를 멈추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절경 앞에서 그냥 지나치기 아까웠기 때문이다.
길 아래로 내려다보면 구불구불 이어진 순례길이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살아 있었다. 그곳을 걷는 순례자들이 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저 거대한 그림 속 한 점이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내려오는 길의 끝자락에서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아세보(Acebo)

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집들과 조용한 골목, 그리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그 위를 조심스레 건너며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은 긴장과 설렘이 묘하게 섞인 얼굴이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자전거 바퀴는 이미 많은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였지만, 그마저도 이 길의 흔적 같아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리를 지나 동네 중심에 도착하자 카페가 몇 곳 보였다. 배낭을 내려놓고 여유롭게 맥주를 마시는 순례자들, 자전거를 벽에 기대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그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나도 자리에 앉아 상그리아 한 잔을 주문했다.
차가운 얼음과 과일이 담긴 상그리아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전신에 남아 있던 긴장이 씻겨 내려갔다.

길은 계속되었다. 포르페라다의 성을 지나고, 햇살이 부서지듯 쏟아지는 카카벨로스의 포도밭 사이를 빠져나오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순례길은 매일이 다르고, 매 순간이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달랐다.
페달을 밟을수록 생각은 단순해지고, 마음은 단단해진다.
크루스 데 페로에서 내려놓지 못한 것들도 이 길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해가 기울 무렵 오늘의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피곤함보다 성취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순례길은 그렇게 사람을 바꾸어놓는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오늘도 길은 75km 이동 했다고,나에게 속삭였다.
“잘 가고 있어. 네가 온 길도 괜찮고, 네가 갈 길도 괜찮다.”

나는 그 말을 믿으며 조용히 페달을 다시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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