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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자전거여행 27

안갯속에서 길을 잃다

by 이쁜이 아빠

안갯속에서 길을 잃다 — 순례길의 마지막을 향하며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새벽이었다.
말 그대로 앞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가 들판을 뒤덮고 있었고, 마치 세상이 잠시 멈춰버린 듯 고요했다.

그날은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 아닌 두려움을 느낀 날이다.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천천히 밟아보지만,
앞이 보이지 않으니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안개 뒤편에서 어딘가 기다리는 햇살이 있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안개가 옅어지며
커다란 나무 뒤로 둥근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갯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순례길이 내게 가르쳐준 첫 번째 진실이었다.
‘길을 잃는 것도 길의 일부다.’

사실,

오늘 우리는 순레길에서 한국라면을 빨리 먹으려다가 길을 잃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쉬는데
멀리서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설마 이 냄새가 여기서?’ 싶을 정도로 반가운 냄새.
한국 라면 냄새였다.

작은 돌담집 앞에 ‘PETER PANK’라고 적힌 나무판과
“한국 라면 있습니다. 진 겔라면.”
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진라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라면을 끓여주던 스페인 아저씨는
한국을 ‘가장 따뜻한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순례길을 찾는 한국인들이
항상 감사하다는 인사와 따뜻한 마음을 남기고 간다며
그 감사함을 다시 돌려주고 싶다고.

한 그릇의 라면이었지만,
그 속에는 국물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이 구간부터는 순례길에 순례객들이 많다.
왜냐하면 이 구간 약 120km 정도부터 산티아고 순례길 인증서가 발급되기 때문이다.

포르토마린을 지나 팔라스 데 레이로 향하는 길.
해가 높이 떠오르자 순례객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걸어서 가는 사람,
가족끼리 나란히 걷는 사람,
그리고 우리처럼 자전거로 달려가는 사람들.

특히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짓 남은 마지막 구간은
그야말로 순례자의 ‘행렬’이었다.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아도
서로를 응원하는 눈빛이 오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마치 도착이 가까워질수록
모두의 발걸음이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의 마지막은, 목적지가 아니라 서로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며
흙먼지가 살짝 일어나는 비포장길,
숲 사이로 새어 들어오던 바람,
구름을 뚫고 올라온 햇살,
그리고 발밑에서 들려오던 자갈 부딪히는 소리까지.

어쩌면 순례길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길을 헤매고, 쉬고, 다시 일어서는
그 모든 과정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갯속에서 길을 잃던 그 새벽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면 결국 길은 열린다.

그게 순례길이 내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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