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일 차
글을 쓰는 도구 혹은 방법은 크게 봤을 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지금의 추세대로 휴대전화나 PC 혹은 노트북 등으로 글을 쓰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종이와 연필을 준비해서 손으로 직접 써 나가는 방법이 있다. 어떤 방법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각자의 취향이나 성격에 따라 자신에게 더 적합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 사실 효율성으로만 따진다면 육필로 쓰는 방법은 어딘지 모르게 그리 좋은 방법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역시도 지금 휴대전화로 글을 쓰고 있으니까.
휴대전화나 PC 혹은 노트북으로 글을 쓰면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있다. 일단 장소에 구애를 거의 받지 않는다. 앉아서는 물론이고 서서도, 심지어는 누워서도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이 방법에 의한 가장 큰 장점은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혹은 필요한 부분을 덧붙일 때 이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는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직접 손으로 글을 써야 한다면 종이는 그야말로 여백이라고는 없이 온통 글씨와 기호 투성이로 뒤덮일 것이다.
단언하긴 어려우나 사정이 그러하니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들의 거의 대다수가 휴대전화나 PC 혹은 노트북 등을 동원해 글을 쓰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시대와는 뭔지 모르게 동떨어진 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조너선 프랜즌, 우리나라의 김훈,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 같은 소설가 등은 아직도 전통적인 방식인 육필을 선호한다. 아니, 선호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떤 기기도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왜 여전히 그 고루한 방법을 선호하게 되는 걸까? 시쳇말로 그들이 일체의 문명을 거부하거나 순전히 기계치들이기 때문일까?
난 이와 관련한 그들의 그 어떤 기사글도 본 기억이 없다. 조심스레 짐작해 보자면 문학이 주는 무게감, 문장에서 묻어나는 그 무게감 때문에 전통적인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마치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한창 글을 쓰고 있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문장의 무게감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글쓰기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지만, 편리한 건 좋으나 그 편리함에 점점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요즘은 짧게 쓰기 열풍이 불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을 글로 표현할 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요즘 들어 특히 더 심해졌는지는 모르겠다. 뭐랄까, 무슨 글쓰기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어디까지나 예외 없이 모두가 짧게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장이 길게 늘어지거나 복문 형태로 서술되는 글은 웬만해선 어디를 가도 환영받기가 어렵다. 물론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문장력이 탁월하다면 어떤 식으로 쓰든 고정적인 독자가 있을 테지만, 긴 문장으로 글을 쓰면 그 누구라도 싫어하게 마련이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읽기 싫은 작가로 사람들에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시중에 나와 있는 웬만한 글쓰기 관련 책들에서도 하나 같이 짧은 문장으로 글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아니 ‘권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치 그렇게 쓰지 않으면 글을 잘 못 쓰는 것처럼, 하나의 진리처럼 떠받들어질 정도다. 유튜브 숏츠에 길들여진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긴 문장과 긴 글에서 오는 따분함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려는 풍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대의 분위기와 유행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직접 쓴 글들을 보면 문장이 짧다. 어쩌면 짧다 못해 ‘후’ 하고 불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 염려까지 들 정도다. 짧은 문장으로 글을 쓴다는 게 곧 문장 전체가 혹은 글 전체가 가벼워진다는 뜻은 아닐 텐데, 문장에서 느껴지는 현실은 그러하다. 게다가 아무리 잘 쓰는 사람이 있어도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추지 못한 작가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한몫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령 평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서 외면을 받는다면 그는 왔던 것처럼 그렇게 불시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글 쓰는 방법을 배운 사람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식견이 있을 리 없고, 그 흔한 문학 이론 혹은 창작 이론 등이 하나가 뼈대로 형성되어 있을 리 없다. 그건 당장 나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기본적인 맞춤법 정도는 어차피 출판 단계에서 걸러지게 마련이겠으나,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맞춤법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글을 쓰는 세상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곳에 어떤 문장부호를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데다, 가령 ‘?’와 ‘!’가 함께 쓰인 ‘?!’나 ‘!?’ 같은 표현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있다. 대화의 내용은 “” 속에, 혼잣말이나 생각 등은 ‘’ 속에 들어간다는 것도 잊었는지, ‘-’, ‘[]’, ‘<>’, ‘≪≫’, 그리고 ‘「」’ 따위의 부호 속에 버젓이 들어가 있기까지 한다. 그런 시대에 우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문장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원 없는 축약어를 사용하거나 더 있어 보인다는 착각 속에 젖어 외국어를 남발하는 것만큼 문장의 무게감을 떨어뜨리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요즘의 추세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도 묵직한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있다. 작은 바람에도 날아갈 만큼 가벼운 그런 글이 아니라 몇 번을 씹고 또 씹어도 음미할 게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