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그 열두 번째 이야기
17년 전 어느 한 작은 공모전에 응모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의식한 탓도 있고, 주변에서도 권유가 있어서 쓰기 시작했던 동화로 겁도 없이 응모했다. 그때 그 작품이 뜻하지 않게도 최종심에 올랐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당선자에게만 개별적으로 연락이 가기에, 당선되지 않는 이상 내 작품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물론 내게는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으니 탈락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공모전 결과를 궁금해하던 차에 당선작이 발표되던 날, 해당 신문에서 내 이름 석 자와 내 작품에 대한 심사평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예심 단계에서 내 작품이 탈락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발표일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는 건 탈락했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특별히 그 작품에 기대를 걸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다른 두 곳에 보낸 작품들과 함께 세 편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 올랐던 그 작품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완결했으니 보내야겠다는 마음 정도만 있었다. 사실 사뭇 기대를 걸었던 나머지 두 작품은, 그나마 이 정도는 꽤 경쟁력이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두었던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이름이 언급되기는커녕 본심에 올라간 몇몇 작품의 제목이라도 언급되던 그 영광조차 누리지 못했다.
그때 나는 작가지망생이 작품을 바라보는 눈과 평론가와 전문 작가의 시각이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시쳇말로 멘붕이 온 것이다. 문학적인 식견이 모자란다는 결정적인 증거겠지만, 그 일은 내 상식과 판단 기준을 뒤엎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젠 그 어디에도 맞출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뭐랄까, 어두운 밤 등댓불만 의존하며 열심히 노를 저으며 앞만 보고 나아갔는데, 갑자기 불빛이 사라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뭐,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따위의 안일한 태도는 그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사태는 기어이 엉뚱한 데로 흘러가고 말았다.
'아! 난 재능이 없구나!'
그렇다고 해도 그대로 붓을 꺾어 버리기엔 미련이 많이 남았다. 속된 말로 한 이삼 년만 더 도전해 보면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옆에서 부채질하던, 같이 글을 쓰던 문우들의 입김도 작지 않게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정말 내 작품이 당선작과 확실한 기량 차이가 나는지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당분간 글쓰기를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행여 별 차이가 없다면, 내친김에 몇 번만 더 도전해 보면, 무슨 수라도 날 것이라는 꽤 시건방진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았다. 당시의 당선자의 작품과 내 작품을 읽어보았다. 나와 함께 최종심에서 탈락한 또 다른 작품은 언급된 최종심사평으로 작품의 수준을 어림짐작했다. 일단 최종심까지 같이 올라갔다가 낙선한 다른 한 작품이 내 것보다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라 해도 아닌 건 분명 아닌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같이 낙선한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아깝다는 얘기였다. 그건 심사평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당선작은 확실히 내 작품과 차이가 있었다. 게임 캐릭터의 에너지 게이지 바를 예로 들자면, 당선작은 100%, 다른 낙선작은 85%, 그리고 내 것은 75% 정도에 해당한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나의 창작 의지를 꺾어 버린 건 세 작품들의 수준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읽어봤으니 수준 차이에 대해 명확히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읽어봐도 어디가 얼마만큼 더 낫거나 덜한지를 모르겠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난,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뒤에 펜을 놓아 버렸다. 아무도 시킨 적 없는 글쓰기에 대해 혼자서 절필을 선언해 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글쓰기를 쉬었지만, 그 다짐이 그리 오래갈 리 없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런데 이번엔 엉뚱하게도 동화가 아닌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 어디 이번엔 제대로 한번 준비해 보자!'
아마 그런 다짐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별 마음에도 없던 자료조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잘 모르는 직업의 세계에 대해 조사했고,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라면 논문도 찾아봤다. 어떻게든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또 읽는 사람의 눈에 더 띄게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상한 기사글 하나를 발견했다.
<신춘문예에도 당선 공식이 있다!>
그 기사글의 제목을 보자마자 단번에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이걸 왜 지금 발견했지? 그때 알았다면 당선되었을지도 모르잖아.'
어쨌든 거기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막상 기사글을 확인한 순간 허망하고 어이가 없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기사글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힘들여 쓴다고 당선되는 건 아니다.
2. 너무 애쓰지 마라. 어차피 당선 공식은 있다.
3. 이왕 쓸 거면 당선 공식에 따라서 써라. 그러면 머지않아 당선된다.
귀가 솔깃해지게 만든 당선 공식이란 바로 심사자의 의도나 성향을 미리 파악한 뒤에 작품을 써서 제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얘기란 말인가? 글쓰기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고, 그래 봤자 독자를 의식해 쓰는 일인데, 그때껏 내 레이더망에 없던 '심사위원'들이 전면에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 기사는 특정한 신문사에 예심 심사위원들과 본심 심사위원들이 확정되면 그 명단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더 어이가 없었던 건 그걸 확인한 뒤에, 자신이 응모하는 공모전에 나오는 심사위원들의 기호도에 맞춰 작품을 쓰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응모자는 성장소설류의 작품을 쓰고 싶더라도 심사위원 중에 성장소설류에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 배정되면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작품 구성에 있어서 시점에 민감한 심사위원이 있으면 시점 사용의 혼동을 없애야 하고, 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끝내주는 묘사를 작품 속에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더러는 시간의 순차적 구성이 아니라 시간을 뒤죽박죽 섞어 쓰는 작품을 선호하는 심사위원이 있으면 이야기를 서술할 때도 앞뒤로 넘나들어야 하고, 심지어 관념적인 소설을 선호하는 사람이 배정되었다면 너무 사실 위주의 소설이나 감성적인 소설 등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아무리 등단에 목매는 처지라고 해도 나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해서 당선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보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말한 공식대로, 또는 심사위원으로 내정된 그들이 원하는 글을 쓸 역량이 안 되었다.
그런 풍조를 반영이라도 하듯 항간에선 신춘문예나 각종 공모전 당선 비책을 족집게 과외처럼 지도해 주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곳은 으레 기성 작가와 그들의 문하생 등으로 이루어져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음대 입시생들이 음대 교수나 전문 연주자에게 레슨을 받는 상황과 같았다고나 할까?
딱 한 번 그런 모임에 참여했던 적이 있긴 했다. 기성 작가가 과제를 제시하고, 문하생들은 글을 쓰고 이를 A4로 사람 수만큼 출력해 가지고 가야 했다. 가지고 간 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은 후에 작품을 품평했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참고가 되는 평은 바로 기성 작가의 평이었다. 아마도 그런 살벌한 풍경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 인격적인 모독을 서슴지 않기도 하는데, 참여한 사람들은 이리저리 난도질하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작품 창작에 대한 의욕을 잃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성 작가가 봤을 때 작가지망생의 글은 어설프기 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수학 공부에 뒤처져 나머지 학습을 해야 하는 부진아가 되어 담임선생님 앞에 오금을 펼 수도 없는 그런 분위기를 느껴야 했다. 그래서 늘 당선 소감을 읽어보면 그렇게 많은 누구누구 선생님, 하며 이름이 언급되는 모양인가 싶었다.
이런 풍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선 공식에 따라 글을 쓰니 당선이 되었다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낭설에 가까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단순하게 글만 써서는 당선은커녕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기민하게 움직인 사람들은 붕어빵 틀처럼 그런 확실한 정형에 맞춰 작품을 써 오기도 했다. 맞다. 적어도 난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설령 내가 우격다짐으로 그 정형화된 틀에 맞춰 글을 썼고, 그래서 기어이 당선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다. 그러면 그다음 작품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해서 기성 작가가 되었을 내가 그다음엔 누구에게 맞춰 작품을 써야 하는 걸까? 이미 그렇게 단련해 당선작을 배출했다면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기에 과연 나의 색깔이 드러나는 작품을 쓸 수 있을까? 기껏해야 나를 당선시킨 그 심사위원의 또 다른 아바타가 되어 글을 쓰게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수필가 김신지는 그의 책, 『평일도 인생이니까』에서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되려는 욕심이지, 좋아하는 일 자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작가가 되려는 욕심이 글을 쓰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망치게 하는 것이지,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흠도 죄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때 한 이삼 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그들이 말하는 공식에 따라 신춘문예나 공모전을 준비했다면, 언젠가는 내가 당선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그건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심사위원의 아바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입맛대로 작품을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글 쓰는 자체를 좋아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에 맞게 작품의 전체적인 틀을 구상하고, 또 계획한 대로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데에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그린 밑그림 속에 적절한 인물들을 배치하는 일에서 짜릿한 전율을 경험하곤 한다.
내 소설을 읽는 사람이 몇 명이 되든, 라이킷을 날려주고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이 몇 명이 되든, 그저 나는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고 좋을 뿐이다. 그래서 당선 공식, 혹은 당선 비책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도 아무도 읽지 않을 내 소설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만약 언젠가 등단하거나 내 소설이 단행본으로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된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좋아하는 글쓰기를, 소설 쓰기를 지금 내가 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