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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쓸고 왔다. 아픈 계절에

by 이열하




사계절 중에 유독 아픈 계절이 있나요?


나는 사계절 중에 가장 아픈 계절이 있다.

가을이 제법 깊어진 어느 날 낙엽이 뒹구는 길거리에서 하늘로 가버린 언니를 데려오려고 목놓아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17년째 가을이 오면 지독한 감기를 앓는다.

그리고 오늘은 마음을 쓸고 왔다.

A헝독감보다도 더 지독한 마음의 감기를 쓸고 왔다.

가을이면 찾아오는 내 마음의 불청객! 언니를 하늘로 보내고 그 이후 매년 찾아오는 그리움의 파도는 나를 벼랑 끝으로 데려간다. 나뭇가지 끝에 아찔하게 매달린 잎사귀처럼, 나도 어디선가 잘못 들어선 길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듯하다. 준비 없이 악천후를 만나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 엄마인지. 아내인지. 딸인지, 선생님인지 수많은 가면 속에서 나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언니와 나를 이어주는 것 같은 언니의 유골함 앞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 있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사진 속 웃는 모습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한없이 바라본다.

반응 없는 눈빛 앞에서 촉촉해지는 내 눈에서만 눈물이 또르르 떨어진다.

아무 말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언니는 "여기에 잠시 멈춰, 네 삶의 이정표를 다시 봐"라고 말하는 표지판 같다. 어쩌면 삶의 고단함에 핑계치고 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이유를 찾기 위해 언니를 방패 삼아 그렇게 잠시 비켜서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웅크려져 있는 도망자처럼.

난 마음 한구석에 쌓인,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그리움으로 가득 찬 서랍을 조용히 비워낸다

그렇게 비로소 나의 마음을 쓸고 있다.

또 언니를 나타내는 숫자들 1-25551 1976년 5월 2일, 언니 이름 3글자 봉안함 그 앞에서 마음이 복잡하다. 결국 죽으면 그뿐인 것을


(언니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듯하다)

"가슴에 손을 대봐,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지니? 그게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야."

또 아른 거린다 "언니 살고 싶어! 살고 싶어..."


그토록 살고 싶다고 갈망했던 언니의 하루를 내가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차차 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잘 살아야겠다. 태양빛이 따갑고 바람이 세차다고 해서 삶의 단면만 보지 말아야겠다. 같은 햇살 속에서 잠시 따뜻함을, 같은 바람 속에서 한 줄기 시원함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는 하루를, 그렇게 잘 산 하루'로 남기겠다고 마음먹기로 했다. 행복은 소박함 그 자체라고.

마음을 비우고 나니 발걸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언니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하늘나라 우체통이 있다. 하늘에 닿기 바라는 마음으로 하늘에 편지를 띄운다.


빛바랜 그렇치만 여전히 빛나는 언니에게
네모난 상자 안에 언니 모습은
그때 그대로네 변한 것이 없네
여전히 방긋 웃고 있는 미소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언니라는 이름을 선물해 줘서 고맙고
날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줘서 고맙고
울고 싶을 때 눈물 흘릴 수 있는
언니 곁을 만들어줘서 고맙고
다 고마워
언니 떠나는 날 약속 했는데
언니처럼 화려하게 예쁘게 살기로
언니가 하지 못한 것 다하겠다고! 했는데
잠시 멈춰있었어
다시 일어날게 다시 환하게 세상을 살아볼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나와 다시 써 내려가야 할 계절이 남아 있다.”

“언니가 남긴 차가운 숫자들 위에, 이제 내가 살아갈 가장 따뜻한 이름과 숫자를 더해본다."




“당신이라면, 어떤 이름과 숫자를 삶에 더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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