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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인간으로 살아가기

신뢰의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마주 대하니 정신이 바스스 무너져 내립니다.


아이 하나가 SNS 24시간 보여주기 기능을 활용에 저를 향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전체 공개로 뿌렸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순 없습니다. 지난 20년간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느낀 깨달음이었습니다. 학생도 나를 불편해 할 수 있고 싫어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도 사실 나와 좀 더 맞는 학생이 있고 대하기 불편한 학생이 존재하니까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다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와 선을 구분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이를 당사자에게 무례하게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혹여 나와 맞지 않다고 하여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그럴 수 있는 아이라 생각은 했지만 매일 얼굴을 마주 보는 아이가 써 내려간 상스러운 욕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피가 얼어붙습니다. 이런 감정소모가 싫어 지난 20년간 저는 항상 학생들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기대감이 커지고, 커진 기대감은 결국 저의 목구멍을 조여왔으니까요.


오늘 아침 상담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죄송하다는 아이의 말은 더 이상 제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쏟은 애정의 크기만큼 허탈감이 저를 압도합니다. 전체를 대상으로 공개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제 귓가를 맴돌다 공허하게 흩어집니다. 친구의 문자를 받자마자 전체 공개를 확인했고 내용을 곧장 삭제했다고 합니다.


학급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인적으로 확인해 보니, 문자를 전해준 아이 한 명을 제외하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희 반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선생님만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선생님도 사람이기에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에게 시간을 좀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웃음도, 어떤 농담도, 어떤 애정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수업만 이어갑니다.


교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습니다. 아이들은 무엇이 선생님을 변하게 했는지 알고 싶지만, 선생님 눈치만 보며 숨만 죽입니다.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 옆을 둘러싼 아이들도 흩어져 자기 자리만 지키고 있습니다. 어떤 말도 붙이지 못한 채 선생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점심시간조차 말 한마디 없이 밥만 먹고 교실에서 책장만 넘기며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이어갑니다.


항상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 동안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너희들이 나에게 보여 준 말과 행동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사람 사이에는 믿음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신뢰는 돈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공들여 하나하나 쌓아가야 합니다.


올해 저희 반 아이들은 유독 애정을 말과 몸으로 스스럼없이 표현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빠져들어 저 또한 아이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학교는 1년짜리 가정입니다.


신뢰가 없는 가족은 가족의 기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고, 자녀가 부모가 폭행하고, 부부가 서로를 비난하고 싸워댈 때 그 가족은 더 이상 가정의 포근함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교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서로를 힐난하고, 교사가 아이를 믿지 못하고, 학부모와 아이가 교사를 비난하기 시작하며 교실은 더 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학생이든, 교사든, 학부모든, 누구 하나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교실 전체가 무너집니다. 균열 사이에 생긴 작은 틈을 방관하지 않고 메꾸어야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균열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좋겠지요. 균열의 가장 큰 예방책은 서로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인간다움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반년 간 끊임없이 반복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알림장에 써 내려갑니다.



2025년 9월 12일 알림장

여덟. 인간답게 생활하기
1. 내 주변 모든 사람에게 예의 지키기
2. 공손하고 예의 바른 말투 상용하기
3.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과 행동은 생각하고 사용하기
4.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은 뒤에서도 하지 말기
5. 내가 한 모든 말과 행동에 책임지기



한 번 깨져버린 신뢰를 다시금 붙이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알았으면 합니다. 선생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에 우리가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버린 것임을 이제부터 아이 스스로가 느껴야겠지요.


6교시 내내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말 한마디 편하게 못하고 숨 죽어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니 미안하기도 합니다. 선생님도 사람이기에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 아이들에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여줍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하루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조용히 인사를 마치고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둘러맨 아이들이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를 연신 외쳐대며 오늘 하루 못다 한 말들을 운동장에서 쏟아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 하루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힘들어했던 아이들의 모습과 겹쳐지며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래도 어른이고, 선생님이니 제가 먼저 마음을 추슬러봐야겠지요.



마음이 흐린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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