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잘 다녀오세요. 나중에 거기서 만나요. 휴대폰 체크 자주 하세요”]
앤디를 밖으로 내보내고 조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호텔 스위트룸 거실엔 식사가 끝난 테이블을 치우는 호텔 직원들과 기자 몇 명이 남아 있었다. 조쉬가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아후, 더워. 누가 물 좀 갖다 주겠어?”]
호텔 직원들 손이 바쁜 것을 보고 누군가가 일어나 조쉬에게 물병을 건넸다.
[“고마워요.”]
물을 마신 조쉬가 옆에 앉아 있던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검고 짙은 눈썹을 찡그린 채로 누군가에게 열심히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소파 손잡이에 걸쳐 둔 그의 갈색 재킷에는 기자 신분증이 달려 있었다. 영국의 한 신문사 기자인 그는 조쉬와 친분이 있었다. 조쉬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물었다.
[“아까 왔던 기자들이 다들 어디에서 왔다고?”]
[“스페인, 프랑스…그리고 캐나다.”]
[“미국은? 미국은 안 왔어?”]
[“못… 봤어요.”]
[“으… 내가 아까 오라고 연락했는데 왜 안 온 거야…”]
조쉬가 신경질 섞인 한숨을 쉬며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와 있네. 따로 시간을 내달라는군. 미국인들이란 항상 특별 대접을 받으려 한다니까. 아후, 피곤해. 또 시간을 어떻게 만들지… 흠…”]
조쉬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잠깐만…”]
그가 손을 들어 조쉬의 폰 화면을 살며시 가렸다.
[“답장하지 말아 봐요.”]
[“왜?”]
[“아니…그…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뭔데?”]
[“미국 기자가 브라질 사람이래요.”]
[“그런데?”]
대답하고 마주친 그의 눈에서 조쉬는 이상한 낌새를 읽었다.
[“뭐야?”]
[“답장을 천천히…”]
[“설마 마주 보고 앉아서 대놓고 그 얘기를 또 꺼내겠다는 거야?”]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지만…”]
[“정말… 정말 지긋지긋해!”]
조쉬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대체 왜 자꾸 그런 일로 문제를 만드는 거지? 다 끝난 것 아닌가? 성인들이 서로 좋아서 만났고, 끝났으면 끝인 거지,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 거야. 어디서 구르다가 왔는지도 모를 하찮은 게… 콜록, 콜록… 캑!”]
[“조쉬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휴… 목이 아파서 그래. 이 호텔이 너무 건조한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 조쉬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음음…그런 면에선 앤디도 너무 세상을 몰라. 다 자신처럼 살고 자신처럼 생각하는 줄 알지. 그러니 이런 꼴을 당하지. 이래서 처음부터 그런 애들한텐 가까이도 가면 안 돼. 자네도 알잖아? 우리 일하는 곳 곳곳이 전부 그런 애들로 꽉 차 있어. 스타한테 한 번이라도 엮어 보려고 안달 난 것들. 쓰레기들.”]
조쉬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일하던 사람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조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고 했는데, 앤디는 그냥 넘어가더군. 봐, 지금도 앤디만 손해를 보고 있잖아. 이 사달이 나도 그것한테 가서 인터뷰하자며 괴롭히는 사람 있어? 오직 앤디만 피해를 보지. 벌레들, 짜증 나.”]
조쉬가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으…”]
[“헤이, 조쉬, 괜찮아요? 땀이 나네.”]
[“머리가 좀 아파. 저기 화병 옆에 약 좀 건네주겠어?”]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병이 놓인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키만큼 올라온 붉은색 꽃송이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약을 집어 든 그의 귀에 딸깍하며 객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찾은 약을 테이블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그가 문으로 걸어갔다. 밖의 소리를 들으려 문 가까이 서 있던 그는 곧 천천히 문을 열고 객실 밖 복도를 살폈다. 조쉬가 물었다.
[“왜 그래? 누가 왔어?”]
복도 저편에 호텔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아니요.”]
그는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약병을 집어 조쉬에게 갔다.
[“아무도 없어요.”]
조쉬는 그가 건네준 약병을 받았다. 약을 먹고 조쉬는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앤디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엔 검은 펜으로 섬세하게 그린 분수 그림이 있었다. 붓에 물을 가득 담아 입힌 색 덕분에, 대리석 분수는 가볍고 경쾌해 보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평범한 분수였다. 분수 높은 곳의 돌로 만든 과일 조각들 가운데 놓인 조그만 아기 제비 조각을 빼고는. 앤디가 그림에 코멘트를 적었다.
<[아름다워요.]>
또 적고 싶은 무언가가 생각났지만, 앤디의 엄지손가락은 머뭇거렸다. 그림에 <좋아요>는 예전에 눌렀다. 하지만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인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전, 앤디와 레베카는 오스트리아의 한 골목을 걷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오래된 상점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던 앤디가 말했다.
[‘저기, 저 조그만 제비 장식 보여?’]
[‘응? 어디?’]
레베카는 앤디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고급 장식장 안에는 금 테두리를 두른 흰색의 찻잔 세트가 있었다. 찻잔 위엔 황금색의 화려한 왕가의 문장을 두른 검은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제비? 저건 독수리인데?’]
[‘아니, 그것 말고.’]
레베카가 찻잔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아하…’]
찻잔의 황금 손잡이 위에 같은 색을 입은 작고 귀여운 새 조각이 붙어 있었다.
[‘응. 보여.’]
[‘왕비를 상징하는 거야.’]
[‘그래?’]
둘은 다시 하얀 골목길을 걸었다. 레베카가 앤디의 팔짱을 끼자 앤디가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검은 독수리는 왕을 상징하고, 제비는 왕비를 상징해. 왕실의 물건을 만들 땐 두 새가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아.’]
[‘항상?’]
[‘아니, 항상은 아니야. 하지만 왕비를 특별히 사랑하는 왕일수록, 물건마다 꼭 제비를 넣었어.’]
[‘와우… 앤디…그런 걸 다 어디서 알았어?’]
[‘영화를 찍다가 알았어.’]
[‘아하… 너무 로맨틱해.’]
맑은 목소리를 내며 레베카가 감탄했다. 둘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태양 아래 금빛 물결이 반짝이는 부산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기대 휴대폰 속 분수 그림을 바라보던 앤디의 눈이 피로했다. 그가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그 옛날 자신은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풍선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아는 것과 가진 것 모두를 마구마구 펼쳐 놓으며 자신만만했었다. 지금 자신은 그때보다 분명 더 여물고 강해졌다. 하지만 따뜻한 공기가 가득했던 안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건 딱딱한 껍데기뿐이었다.
[“앤디, 이쪽으로 오세요.”]
[“오케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앤디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어갔다. 부드러운 카펫 위로 굳은 발걸음을 옮기며, 앤디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던 그 영화의 나머지 이야기를 생각했다. 왕은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을 없애도록 명령했다. 그녀가 쓰던 물건, 그녀가 즐겨 가던 별장, 그녀의 이름으로 치러지던 모든 행사, 그리고 그녀를 상징했던 조각까지 모두 찾아내 부수었다. 앤디가 기자 회견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무대로 올라가며 자신을 강하게 비추는 조명에 그는 눈이 부셨다.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으론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사람들의 환호에 인사했다.
[“부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 앤디 코넬 씨입니다.”]
앤디가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는 얼마 전 배운 대로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를 했다. 환호성이 더 커졌다.
[‘이 조각들도 전부 없애는 게 좋겠어요.’]
레베카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후, 앤디는 갖고 있던 호텔을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했다. 호텔 곳곳에 있던 아기 제비 조각 장식은 원래 호텔을 매입할 때부터 있던 것들로, 앤디도 퍽 아끼고 좋아했던 것이었다.
[‘전부 다요?’]
[‘응.’]
일 년 전, 국왕은 왕비가 사망한 후, 그녀를 상징했던 작은 제비 모형을 되도록 많은 곳에서 치우도록 지시했다. 왕실의 이름으로 만들던 소소한 기념품에서는 물론, 수도에 있는 궁전과 의회, 교회에 있던 그림과 조각상에서도 작은 제비는 사라졌다. 이 호텔 앞 공원에 있던 장식품들과 분수의 조각들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이 그렇게 했으니, 저희도 따라서 바꾸도록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앤디는 서류에 서명하고 호텔을 나섰다. 리모델링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앤디는 호텔을 한 비영리 단체에 넘겼다. 그 이후로 그는 그 호텔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영화제 기자 회견이 끝났다.
“앤디! 앤디!”
“앤디! 여기 좀 봐주세요!”
[“헤이! 앤디! 사진 찍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심사위원장을 보고 헬렌이 말했다.
[“앤디의 인기는 여전하네요.”]
조 용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하기 전 제 모습이군요.”]
말하며 아리얀이 웃었다. 조 용 감독이 아리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앤디가 나머지 심사위원들과 합류했다.
[“여전히 스타네요, 앤디.”]
앤디가 곤란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올라가시죠. 단체 촬영이 있습니다.”]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위층으로 향했다. 앤디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의 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메일과 연락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앤디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앤디, 어서요.”]
헬렌이 부르는 소리에 앤디가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은 후 서둘러 따라 올라갔다. 휴대폰에서 또 알람이 울렸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인천국제공항의 짐 찾는 곳에, 한 소녀가 휴대폰을 보며 혼자 서있었다. 깡마른 백인 소녀는 검은 반소매 티셔츠에 긴 청바지 차림이었다. 검은 캡모자 아래로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소녀 옆에는 큰 여행 가방 두 개가 실린 카트가 있었다. 소녀와 같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소녀 옆으로 걸어왔다.
[“다 찾았어?”]
모린이 카트 위에 손가방을 올리며 물었다.
[“응… 엄마, 괜찮아?”]
소녀가 모린을 보고 인상을 썼다. 모린은 유달리 창백해 보였다.
[“어, 괜찮아.”]
[“괜찮아 보이지 않아. 좀 앉아봐.”]
[“휴…”]
모린이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 소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어지러워?”]
[“조금.”]
[“그러게. 나 혼자 온다니까.”]
[“너 혼자 여길 어떻게 와? 열다섯 살이?”]
[“내 친구들은 이제 다 혼자 다녀.”]
소피는 싱가포르 국제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그 애들은 원래 자기 집으로 돌아간 거잖아.”]
[“어쨌든.”]
소피가 어깨를 한번 들썩거렸다. 모린이 이마를 짚었다. 엄마의 얼굴을 슬쩍 살피고 소피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전화하셨었어.”]
[“비행기라 못 받았구나.”]
[“몰래 가서 깜짝 놀라게 해 주자더니, 엄마가 여기서 쓰러지면 할아버지 정말 까암짝 놀라시겠다.”]
[“…으.”]
모린이 인상을 썼다.
[“어떡해? 엄마, 호텔까지 갈 수 있겠어?”]
[“가야지.”]
모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피는 엄마를 살피며 카트를 밀었다. 둘이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버튼 호텔 서울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했다. 모린이 뒷좌석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소피가 창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싱가포르랑 비슷하네.”]
대답이 없자 소피가 엄마를 흘끗 보았다. 아직 엄마는 눈을 감은 채 쉬고 있었다. 소피가 물었다.
[“호텔은 어떻게 예약했어?”]
[“조쉬가 해줬어.”]
[“아…”]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소피가 또 슬그머니 물었다.
[“아빠한테 연락할 거야?”]
[“했어.”]
[“… 아니…그 아빠 말고.”]
모린이 감았던 눈을 뜨고 소피를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소피가 시선을 피했다. 모린이 손을 뻗어 소피의 손 등을 덮었다.
[“네 아빠한텐 아직 말 안 했어.”]
[“왜…?”]
[“며칠만 있을 거잖아. 금방 돌아갈 거라…”]
모린이 소피를 데리고 영국을 떠날 때, 소피의 생부는 자신의 딸이 멀리 간다는 사실을 언짢아했다. 그는 앞으로 딸이 있게 될 곳이 어디인지,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게 될 것인지를 자세히 알기를 원했다. 특히, 나라를 바꿔 이동할 땐 꼭 알려주기를 당부했었다. 단순한 부탁이 아닌, 변호사를 대동한 정식 요청이었다.
[“그래. 호텔에 도착하면 할게.”]
[“……”]
[“소피, 걱정하지 마.”]
[“… 걱정 안 해.”]
소피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딸을 보며 모린은 말이 없었다.
“승우야 잠깐만 이리 와 봐.”
혜진이 부르는 소리에 승우가 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혜진은 스피커폰으로 누군가와 한창 통화 중이었다.
“승우 왔어. 이제 말해.”
<“여보세요? 승우야, 나야. 미희 이모야. 잘 지냈어?”>
익숙한 목소리에 승우가 반갑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래. 승우 목소리 들으니까 반갑다. 우리 승우는 목소리도 멋있네. 어때? 긴장되지?”>
“네. 좀 그래요.”
<“그래. 왜 긴장이 안 되겠어. 에구…”>
“동생들은 잘 있어요? 아저씨는요?”
<“애들 이제 고등학생이라 학원 다니느라 바쁘고, 아저씨는 잘 있어. 이제 혼자서 밥도 차려 먹고 세탁기도 돌리고. 다 컸어.”>
혜진과 승우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모는 어떠세요? 지금 영화제 중이라 바쁘시죠?”
<“응. 너무 바쁘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 그래서 내가 너무 미안해. 승우가 군대 가는데 이모가 가서 배웅해 줘야 하는데, 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화만 해서 미안.”>
“아니에요.”
<“그러니까 한번 오라니까 오지도 않고…”>
“너 바쁜데 어떻게 가.”
혜진이 끼어들었다.
<“아니야. 또 알고 보면 별로 안 바빠. 그냥 바쁜 척하는 거야.”>
승우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승우야. 잘 다녀오고, 휴가 나오면 연락해. 이모가 용돈 쏴줄게.”>
“네.”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 엄마 좀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 승우야. 이모가 엄마 잘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왜 날 감시를 해? 무슨 얘기야?”
“고맙습니다.”
“넌 뭐가 고마워.”
셋이 웃었다. 혜진은 승우에게 방으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이모, 그럼, 다음에 또 통화해요.”
<“그래, 승우야. 안녕.”>
승우가 방으로 들어가자, 혜진은 스피커폰을 끄고 미희와 통화를 이어갔다.
<“목소리가 밝네.”>
“그래? 밝은 거 같아?”
<“응.”>
“다행이네…”
혜진이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리고 편히 앉았다.
<“이번 주말이라고?”>
“응.”
<“잘 다녀와. 혼자 가는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응. 너는 바쁘지?”
<“응. 이번 주말까지라서 계속 바쁠 거야.”>
“이번엔 뭐 재밌는 일 있어?”
<“별로 없어. 이젠 내가 직접 가서 일하는 게 아니라서.”>
“그래?”
<“그리고 요새 배우들이며 아이돌들, 난 누군지 잘 몰라서 좋은지 어떤지도 모르겠더라. 애들은 엄청나게 좋아하던데. 아, 맞다. 너 봤지? 앤디 코넬 온 거?”>
“…응.”
<“많이 늙었더라. 옛날에 봤을 땐 후광이 비췄는데.”>
“……”
<“너도 봤잖아. 오스트리아에서. 그때보다 많이 늙었던데?”>
“난 그때 못 봤고, 주연이랑 네가 봤지.”
<“아, 그랬나?”>
생각난 김에 혜진이 물었다.
“주연이는 잘 지내?”
<“응. 주연이가 경주에 간지 이제 2년 다 되어가나?”>
주연은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진 후 시댁 근처로 이사를 갔다. 마침 경주 여행사 직원이 필요했던 미희의 사촌 오빠가 주연의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또 한 번 가 봐야 하는데, 간다 간다 하면서 못 간 지 일 년이 다 되었네. 부산이랑 경주가 먼 것도 아닌데.”>
“다들 사는 게 바쁘니까…”
<“주연이도 바빠. 간병하랴, 가이드하랴…”>
“가이드? 주연이는 사무실 일 한다며?”
<“가끔 사람 없으면 가이드로 나가기도 한대. 사무실이 작잖아.”>
“그래? 주연이가 가이드를?”
<“은근히 재밌대.”>
맞다. 규칙적으로 밖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삶의 에너지가 된다. 자신도 그래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혜진은 작은 깃발 아래 옹기종기 사람들을 모아 이곳저곳 부지런히 다닐 주연의 모습을 상상했다.
‘경주… 거기가 어땠더라?’
경주에 가본 지 20년도 넘은 것 같았다. 지금 생각나는 것이라곤, 교과서 속 첨성대 사진뿐이었다. 혜진이 물었다.
“아직도 경주는 관광객이 많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꾸준히 와. 외국인도 오고.”>
“그래?”
<“경주 많이 바뀌었어. 예쁘게 잘해놨어.”>
“오…”
<“근데 젊은 사람들은 잘 안 와. 유적지라 따분하니까. 젊은 사람들은 해변이나 휴양지 가고 싶겠지. 그래서 지방에선 바닷가 같은 데서 술 한잔하고 놀 수 있는 곳을 만들려고 하지, 그런 유적지 같은 곳은 투자가 잘 안돼. 문화재 때문에 개발도 어렵고.”>
“그렇구나.”
<“우리만 그런 게 아니야. 저기, 유럽도 그래. 우리 오스트리아에서 묵었던 그 호텔, 기억나?”>
“오스트리아 호텔?”
<“옛날에, 너랑 나랑 주연이 셋이 여행 갔을 때 묵었던 그 예쁜 호텔 말이야. 앤디 코넬 만났던. 내가 이번 봄에 애들 데리고 유럽 여행 다녀왔잖아. 거기 우리가 잤던 호텔에 이번에도 가볼까 해서 알아봤더니 없어졌더라고. 무슨 연구소로 바뀌었어.”>
“아예 다 허물고?”
<“게네들은 그렇게는 안 하더라. 외관은 남기고 안에만 바뀐 거 같아. 껍데기만 남겼달까? 하여튼, 호텔은 없어졌어.”>
“아…”
혜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주변에 풍경도 좀 바뀌었고. 거기 예전엔 진짜 별것도 없더니, 이번에 갔는데 맥도널드, 스타벅스도 있었어.”>
“그래?”
<“거기. 큰 공원 있던 거 기억나나? 공원 안 언덕 위에 으리으리한 유적지 같은 건물이 있었잖아. 거기 올라가려면 계단이 엄청 많았던. 왜, 거기서 우리가 커피 마시려고 했는데 못 마셨잖아…”>
“어. 생각나.”
<“그 건물 안에 스타벅스 생겼더라. 하하하.”>
순식간에 혜진의 머릿속에 초록 언덕 위에 웅장하게 서 있던 흰색의 유럽식 건물이 떠올랐다. 온통 회색이던 오래된 기억 위로 찬란한 색이 번져 나갔다. 유달리 높고 맑던 파란 하늘과 건조한 공기 그리고 메마른 모래밭.
투두둑 툭 툭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녀 뒤에 그 분수가 있었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 제 집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있던 혜진은 삼십 년 전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전 그 공원에서 혜진은 하얀 대리석 분수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혜진의 키를 훨씬 넘는 커다란 분수에 오밀조밀 새겨진 섬세한 조각들은 시원한 물을 맞고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누가 저런 걸 만들었을까? 사람이 정말 저런 걸 만들 수 있을까? 혜진은 저렇게 고귀하고 예쁜 것이 많은 이 세상이 놀라웠고, 저만큼 멋진 것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던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젊은 혜진에게 세상은 멋지고 황홀하면서도 벅차고 힘겨웠다. 그런데 세월이 이만큼 흐르고 나니, 혜진의 눈엔 그 화려했던 분수 대신, 그것을 보고 있던 어린 날의 자신이 보였다. 겉은 젊음에 빛났지만, 속은 갈증으로 타들어 갔던 날들. 괜한 걱정으로 마음 한편이 늘 답답했던 그 느낌이 생생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애처롭고 불쌍했다. 뭐든 혼자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왜 스스로에게 그렇게 가혹했을까? 젊은 날의 희망과 설렘, 두려움이 뒤섞여 늘 예민하고 마르고 불안했던, 너무나 어설펐던 한 어린 어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손을 잡아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용기를 주고 싶은 그런 자신이었다.
“아… 그랬구나…”
<“공원도 좀 바뀌었고 예전이랑 다르더라고. 그러니까 너희들 생각이 더 나더라. 와서 이걸 같이 봐야 하는데. 다음에 우리 셋이 또 여행 가면 좋을 텐데.”>
“그러게.”
<“너는 이제 승우 군대 가니 시간 되려나? 나는 애들이 입시 시작이라 애매하네.”>
“주연이도 일도 하고 남편도 아프니까…”
<“이것저것 생각 말고 그냥 확 가야 하는데. 우리가 열흘 빠진다고 다들 망할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
혜진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튼, 건강 관리 잘하고, 나중에 또 통화해.”>
“그래. 너도.”
혜진은 전화를 끊고 베란다 밖을 보았다. 눈앞엔 반듯이 줄 선 아파트가 보였지만 마음은 아직 그곳이었다. 바람에 날리던 고운 물 가루가 닿은 듯, 두 뺨이 찌릿했다. 그녀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하던 그녀는 드로잉스타 앱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 적힌 글자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파일 중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는 비닐에 넣어 둔 작은 그림 한 장을 찾았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비닐에 덮인 그림을 살살 만져 보았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