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자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자유로운 삶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가벼운 청년들의 대화부터 정치 담론에서까지 언급되는 모호한 개념, 자유.
통제 없는 삶과 자유로운 삶은 반대인 듯 한 끗 차이인 듯싶다.
자유 없는 삶을 상상하자면, 어떠한 통제 아래 있는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예를 들면, 일제의 정치적 탄압 아래 독립운동을 외치던 우리 역사의 정신은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국가 존재적 자유를 광복 이후에 찾았지만, 한민족끼리 싸우고 나누어지던 내부 분열을 진정한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무엇보다 ’ 완전한 ‘ 자유는 허상이다. 가족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가장의 하루의 반은 고된 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반나절을 일로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을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누가 함부로 누군가의 삶의 가치를 재단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생겨나고 없어진다.
무용함 속 풍요와 그 사이 여백들을 즐기다 사라지는 삶은 아름답다.
얽히고설킨 삶의 요소들 중,
어느 부분을 나의 자유로 채택할지.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수 있게 만들어줄지.
뻔한 말이지만 선택과 포기(”선택“ 자체가 “포기”를 포함하므로 동어반복!)의 개념이다. 밖에서 굶어 죽느니 감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부르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가치와 반하기 때문이지, 누군가의 최선의 자유일 수도 있다.
내가 가진 이상과 현실을 조합해서 나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갈지는 내 손에 달린 문제이다. 주변의 의견이 과하게 들어간다면 빈 껍데기뿐인 삶을 살게 된다. 주변의 시선을 더 중요시 여긴다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좋아 보이는 삶을 연기하는 것이 본인의 나름 최대치 행복일 수 있다.
사람의 마음과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본인이 미래에 무엇을 원할지 예측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 어딘가에 위치하며 양쪽으로의 접근성을 확보하는 것이, 적어도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사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가치들을 뭉쳐놓은 범위 사이 어딘가에 내가 존재할 수 있도록 나를 통제하며 사는 삶.
하지만 중용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인 물이 되는 것이 파도의 목적이 아니 듯.
이리 갔다 저리 가는 물살 자체가 파도의 생명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