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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혜사(定慧寺)의 물

by 박재옥


신성한 것들은 물로 흐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한때는 하늘을 달리던 말(馬)이었다

정혜사 대웅전 앞마당 우물터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흘러내렸을 물줄기

천오백년 전 사비에서 온 왕이 마셨다는

물맛은 순수하여 하늘에 닿아있었을 것이다

물 한 바가지 마시고 고개 드니

비수처럼 찌르는 초록의 산정이 아프다

왕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라는 지켜야 할 것 많고,

지킬 수 있는 것들은 없는 마당에

간곡함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바쳤을 물 사발

왕의 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산정에서 흘러내리던 물은

유민(流民)들의 염원까지 더해져

끊기지 않고 흐르며 신성(神聖)이 되었다

순수가 전설이 되는 기나긴 물의 시간

그 사이 숲에 쌓인 꽃잎의 무게 만만치 않고,

계곡에 발 담그고 간 바람 헤아리기 어렵다

먼 길 와서 마시는 한 모금이 각별하다

흘러내리는 마음을 씻는다




*정혜사(定慧寺)-충남 청양군 칠갑산 기슭에 있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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