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 화염(火焰)

by 박재옥


영양에서 백암온천으로 가는 길

길게 늘어선 배롱나무 가로수가 불타고 있다

언제였던가, 이 길을 지나갔던 것은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이 길을 지나갔었다

그 때는 배롱나무 불꽃을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었다

새빨간 배롱나무 불꽃이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어서

다시 이 길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 위에서 놓쳐버린 것들

의식 없이 지나쳤지만

눈 여겨 봐야 했을 필연적인 장면들이

배롱나무 불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필연을 가장한 우연처럼

간발의 차이로 엇갈려 빗나갔을 운명들이


영양에서 백암온천 가는 길

배롱나무 가로수 붉은 소실점 너머에 두고 온

의미 없이 지나간 길들에 대한 아쉬움

젊은 날의 미련을 채워보려고

바람이 하늘의 불을 훔쳐다 꽃불을 피우듯

나신으로 타오르는 배롱나무 꽃불을 훔쳐서라도

내 몸에 화염을 피워보고 싶은 건지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 아카시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