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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2화 영등포시장

새벽녘, 봄비가 남긴 차가운 습기가 코끝을 시큰하게 스쳤지만, 오전 10시를 넘기자 공기는 솜사탕처럼 가볍고 건조하게 바뀌었다. 흙냄새와 꽃의 달콤한 향기는 이미 물러났고, 미지근한 바람에는 짙어진 초록 잎사귀에서 나는 싱그럽고 약간 씁쓸한 풀 비린내가 섞여 코를 자극했다. 길가에는 아카시아 꽃이 지고 남은 잔향만이 봄날의 추억처럼 희미하게 감돌 뿐이었다. 오후의 햇살은 더 이상 봄의 영역이 아니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빛은 희고 건조하여, 피부 위에 가벼운 열기를 남기는 날카로운 태양이다. 그림자의 경계는 짧고 짙어져 모든 사물의 윤곽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관리부 사무실의 정희는 얇은 블라우스 차림이었지만, 창가 자리에 앉은 어깨에는 이미 초여름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창으로 들어오는 강렬해진 햇빛을 피하려 무심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냉방기가 돌아가지 않는 실내 공기는 텁텁했고, 그녀의 목덜미와 팔뚝 위로 땀이 막 맺히기 직전의 끈적함이 감돌았다. 정희는 얇은 서류 한 장을 들고 있었지만, 집중력이 자꾸 흐트러졌다. 창밖으로 느껴지는 이 숨 막힐 듯한 생명의 기운, 그리고 다가올 더위에 대한 막연한 피로감은 해고된 언니들의 투쟁으로 인해 팽팽하게 긴장된 그녀의 심리 상태와 묘하게 겹쳤다.

같은 시각, 공장 생산동의 민우는 이미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거칠고 단단한 손목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햇볕에 그을리기 시작한 미지근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처럼, 민우의 마음속에도 고요했던 봄날의 기다림이 끝나고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이 초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곧 다가올 투쟁의 격랑을 예감했다.

“김정희! 이리 와 앉아봐. 네가 요즘 마음 상태가 몹시 어지러운 모양이야?”

관리부장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지난주에 ‘여공들 잡담 보고’ 지시 내렸지? 그런데 아직 단 한 건도 보고가 없어. 회사는 지금 내부 기강이 중요한 시기야. YH 무역 사건 이후로, 회사가 여공들을 어떻게 통제하려는지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다 이 말이야.”

관리부장은 정희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생산동 잔류 인원 대상, 투쟁 재연 조짐 관찰 보고서’라는 제목이 붙은 서류였다.

“당장 오늘 오후부터 생산동 여공들의 조직적인 움직임, 외부와의 접촉 여부, 특히 외부 침입자가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 보고해야 해. 회사에 불순한 씨앗이 뿌려지는 건 막아야지.”

‘외부 침입자’라는 말에 정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에 ‘위장 취업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지. 빨갱이들이 “내가 빨갱이요” 하고 이름표 붙이고 다니겠니?”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중앙정보부 직원들이나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다지만, 이놈들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든. 나도 유심히 몇 놈을 지켜보고 있으니 정희 너도 면밀하게 관찰하라는 거야. 알았어?”

“네.”

정희는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혹시 자기도 저들의 감시 대상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또한 그녀가 쫓겨난 여공들을 아무도 모르게 돕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싶은 두려움도 있었다.

“우리 회사가 너에게 월급을 주는 이유가 뭔지 똑똑히 알고 처신하란 말이야.”

관리부장의 날카로운 압박에 정희는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관리부의 방패이자 노동자의 감시자라는 덫에 완전히 갇혔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절망했다. 이 무거운 짐을 혼자서 어떻게 짊어져야 할지 막막했다.


퇴근 시간, 정희는 관리부 사무실을 빠져나와 막연히 생산동 후문으로 향했다. 관리부장에게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행렬 속에서 김성태의 얼굴도 보였다. 그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된 노동을 마친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런데 김성태가 낯선 행인을 발견한 듯 잠시 주춤하며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정희는 그가 왜 저렇게 주위를 경계하는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김성태가 아무렇지 않게 이쪽을 향해 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조심스럽게 다시 담벼락을 벗어나서 걸어 나왔다.

“김성태 씨!”

정희는 조그만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민우는 흠칫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반가운 표정으로 정희에게 다가왔다.

“아따! 정희 씨 아녀유? 오랜만이예유? 어쩐 일이대유?”

민우는 그녀의 어색함을 감추어주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정희도 반갑다는 듯 활짝 웃었다. 지나가던 다른 직원들도 두 사람을 쳐다보며 관심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산동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라면 정희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정희가 그들 중에서도 유독 ‘김성태라’는 이름을 부르고 서로 활짝 웃으며 아는 체를 하니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고, 그들 모두가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하다.

“안녕하세요, 성태 씨. 퇴근하시는 중인가 봐요?”

정희 역시 다른 직원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마치 볼 일이라도 있는 양 연기를 했다. 젊은 남녀의 사연은 한 번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기만 하면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산을 태우듯 소문으로 번져갈 수 있다는 것을 정희는 잘 안다.

“저기 지난번 수리한 기계가 잘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서요.”

“네 아주 잘 돌아가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서 사람들은 “공적인 일이었군” 하는 표정으로 각자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서둘러 갔다.


민우는 정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며 지난번 만남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참! 정희 씨, 지난번에 광산 김가끼리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해놓고 지가 영 연락을 못 드렸구만유. 미안혀서 어쩐대유?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광산 김가 종친회 한번 다시 허는 건 어뗘유? 커피라도 한잔 하시는 거 어떨랑가 모르겠네유.”

민우의 제안은 정희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그녀는 관리부장의 지시와 ‘외부 침입자’ 색출이라는 무거운 짐을 드디어 누군가와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혹시 김성태라는 사람을 통해 얻어들을 정보가 있지 않을까에 대한 기대감도 가졌다.

“성태 씨, 저, 아직 저녁 식사를 못 했어요. 커피도 좋지만, 혹시 저녁 식사 먼저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려유! 밥이 먼저지유! 영양가 없는 시커먼 물은 낭중에 마셔유.”

“성태 씨! 혹시 영등포시장에 가서 국밥을 드셔보지 않겠어요? 왠지 오늘처럼 힘든 날은 따뜻하고 든든한 국밥이 당기네요.”

민우는 정희의 의외의 제안에 속으로 놀랐다. 예쁘장한 얼굴의 정희에게는 왠지 국밥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등포시장유? 아따, 지야 좋쥬! 시장 국밥이 서울 국밥 중에서는 젤로 인심 좋고 맛있는디! 그럼유, 우리 생산직 노동자는 밥심으로 살어야 허니까유? 그리고 지는 사람냄새가 나는 시장이 질 좋아유.”

민우는 ‘노동자의 정서’를 강조하며 그녀의 제안을 순박하게 포장했다.

정희는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국밥이 밥심이죠. 제가 아는 분이 거기 계시기도 하고요. 제가 오늘 저녁 살게요. 국밥 드시고, 커피도 제가 나중에 살게요.”

정희가 아는 사람은 바로 곰소댁이었다. 서로 바빠서 요즘 얼굴 보기 어려운 사이라 오랜만에 곰소댁의 넉넉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영등포시장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영등포시장에 도착했을 때, 시장은 이미 저녁 파장이 시작되어 혼잡했다. 비릿한 해산물 냄새와 뜨거운 국물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민우와 정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었다.

“이쪽이 국밥집이 몰려 있는 곳이유. 근디, 정희 씨 아는 분은 어디 계셔유?”

“이 근처에서 생선 좌판을 하시는 분이에요. 곰소댁이라는 분이예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 곰소댁은 노동자들이 주요 연대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척해야 한다.

“곰소댁이라... 캬! 월매나 정겨운 이름이유?”

“우리 옆집 사시는 아줌마인데 정말 좋은 분이예요.”

“워메 정희 아녀?”

그들이 생선 좌판이 몰려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곰소댁이 정희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곰소댁의 좌판은 이미 정리가 끝나고 낡은 비닐 천막만 덮으면 끝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이여? 나랑 같이 퇴근헐라고?”

“네 아줌마 국밥도 한 그릇 사드리고 커피도 한잔 같이 마시고 가려구요. 숙희는 영석이가 챙기고 있을 테니까요.”

“그려? 그라믄 오늘 정희 덕 좀 볼까?”

“고창댁 아줌마도 같이 가시면 좋지요.”

“아녀, 아녀. 참말로 고마운 야그지만 나는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혀.”

고창댁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지나가는 손님인지 알았는데 한 청년이 정희 옆에 서서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곰소댁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근디 이 총각은 누구여?”

곰소댁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웜마! 우리 정희가 이제 연애를 시작해부렀구만.”

고창댁이 무척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정희는 얼굴이 빨개져서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부인했다.

민우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다. 전혀 낯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두 사람은 무슨 관계간디 그렇게 다정해 보이는 거여?”

곰소댁이 다시 두 사람을 미심쩍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회사 직원이예요. 광산김씨 종친이라 종친회 하기로 한 거예요. 아휴!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네.”

“그려? 그런디 그 수많은 직원 중에 광산 김씨가 저 총각 한 명만 있을랑가?”

곰소댁과 고창댁은 아직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눈치다.

“안녕허세유, 저는 김성태라고 허구유. 정희 씨는 관리부, 그리고 저는 생산부에 근무하고 있어요. 정희 씨랑 원래 커피 한잔 하려고 했는디유 정희씨가 배가 고프다고 허시면서 여기로 가서 국밥 먹고 커피 한잔 허자구 혀서 따라왔구만유. 오해들 마셔유.”

“아따 근디 총각이 아주 훤칠허고 자알 생겼다.”

고창댁이 민우의 위아래를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국밥이라면 저그 ‘고향순대국밥’만헌 디가 어디 있간디?”

“최사장! 여그 손님 받으쇼.”

고창댁이 최사장네 가게를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말고 어서 두 분도 같이 가시죠.”

고창댁도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서는 걸 보니 두사람의 관계가 어지간히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정희는 민우와 함께 곰소댁과 고창댁을 모시고 최사장네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어! 정희 처녀는 내가 아는 사람인디, 저분은 누구여?”

“네, 저는 김성태라고 헙니다.”

“우리 국밥 네 개 주세요.”

정희가 주문을 했고, 최사장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근디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디?”

곰소댁이 또 한마디를 던졌다.

정희 귀가 빨개졌다.

“아줌마도 참!”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고 그냥 짝을 혀도 되겄는디?”

고창댁이 장단을 맞추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혀.”

국밥을 가져온 최사장이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밥이 코로 들어가겠네요. 이제 그만들 놀리셔요.”

“그려 어서 밥 먹자고.”

드디어 곰소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초면에 우리가 너무 실례를 헌 거 아녀?”

고창댁이 말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우리 충청도는 원래부터 순댓국으로 유명한 곳이잖유? 근디 이 순댓국은 제 인생에서 손꼽을 만헌 집이네유.”

“맛이 있다고 헌께 다행이구만.”

어느새 최사장이 옆자리에 와서 앉아 있다가 한마디를 했다.

“우덜이 나이를 먹어본께 사람이 보이더라고. 그런디 두 사람은 자주 잘 어울려.”

“아먼. 그라제.”

곰소댁과 고창댁이 동시에 최사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이제 그만하세요. 김성태씨 체하겠어요.”

그런데 아까부터 세 사람이 놀릴 때 민우는 정희와 달리 둘 사이의 관계를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태도를 계속해서 취하고 있다 보니 세 사람은 더 놀리는데 신이 난 모습이다.

“근디 총각 고향은 충청도 어디당가?”

“예산군 대술면이유.”

“충청도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가 많다고들 혀. 그리고 옛날부터 양반 가문이 많다봉게 체면을 중시허고 점잖다고들 혀.”

곰소댁이 민우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근디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혀서 의뭉스럽다고들 허던디요?”

민우가 자기 고향을 추켜세우는 곰소댁에게 겸양의 표현인지 스스로 고향을 낮추는 것인지 한마디를 했다.

“‘글쎄유’, ‘됐슈’ 같은 말을 자주 헝게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다는 말도 허더구먼.”

고창댁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현실적이고 실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고 결단이 느린 것 같지만 신중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요?”

정희가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피해를 줄까 봐 조심허는 배려심에서 나오는 성격일 거여. 사람마다 개인의 기질과 성격은 다른 것 아니겄어? 충청도 사람을 모두 묶어서 한 가지 성격을 가졌다고 말헐 수 있는가?”

최사장이 아주 점잖게 말했다.

“역시 오라버니구만.”

곰소댁이 최사장을 존경한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까 성태씨가 충청도 사람들이 의뭉하다고 했잖아요. 혹시 ‘위장취업자’ 아니세요?”

정희는 자기가 던져놓은 말이 우습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민우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아서 하마터면 먹고 있던 순댓국을 뿜을뻔했다. 다행히 아무도 민우 얼굴에서 나타난 당황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모두 깔깔 웃으면서 정희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정희 씨!”

민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국밥집의 웃음소리를 뚫고 정희에게 닿았다.

정희는 그가 평소보다 훨씬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성태 씨? 아직도 놀랐어요? 농담이에요.”

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은 고창댁, 곰소댁, 최사장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너머에 있는 정희의 얼굴에 깊이 박혀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 시장 상인들 앞에서 이 엄청난 진실을 털어놓는 것은 무모하고 이기적인 행동이 될 터였다. 이 진실은 두 사람만의 위험한 비밀이어야 했다.

민우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순간적으로 찾아왔던 결단의 충동을 억눌렀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김성태’의 순박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아따! 지가 하마터먼 국물 뿜을 뻔 혔구만유. 놀랐슈. 정희 씨가 농담을 그리 쎄게 하실 줄은 몰랐슈.”

그의 대답에 곰소댁이 다시 크게 웃었고, 정희도 안도하며 민우의 팔을 살짝 쳤다.

“놀라긴. 내가 성태 씨 놀리려고 했죠.”

“밥은 코로 먹는 거 아니여! 어서 먹어!”

최사장이 훈계하듯 말했다.


민우는 그들에게 섞여 다시 국밥을 먹는 시늉을 했지만, 그의 머리는 이미 다음 행동 계획으로 가득 찼다. 그는 지금의 만남이 단순한 호감이 아닌, 진실을 공유해야 할 절박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식사가 끝나자, 민우는 계산을 하려는 정희를 한사코 말렸다.

“아이고, 정희 씨! 오늘 국밥은 지가 사야지유. 광산 김가 종친회 회비는 지가 내야 허유.”

민우는 억지로 돈을 내고, 정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들은 곰소댁, 고창댁, 최사장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국밥집을 나섰다. 곰소댁과 고창댁은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며 덕담을 던졌다.

“총각, 정희 처녀 잘 챙겨줘! 다음에는 좋은 소식 좀 듣자!”

두 사람을 향한 시장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과 농담은, 민우에게 자신이 짓고 있는 이 기만이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시장 거리를 벗어나자, 정희는 말했다.

“이제 커피 마시러 가야죠? 제가 근처에 있는 조용한 다방을 알아요.”

“다방유? 아따! 그럼유. 종친회 마무리는 커피 한 잔으로 깔끔허게 혀야지유.”

민우는 멍랑하게 말했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시장 골목을 벗어나 번화가에 있는 한 낡은 다방으로 향했다. 다방은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그들을 둘러싼 것은 은은한 음악과 고요함뿐이었다.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밀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국밥집에서 나누지 못했던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성태 씨. 사실 오늘 영등포시장에 온 건, 관리부장의 지시 때문이에요.”

그녀는 낮에 있었던 '외부 침입자' 색출 지시와 자신이 느끼는 감시의 공포를 떨리는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민우의 순박한 노동자적 시선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조언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부장님은 우리 회사에 위장취업한 ‘빨갱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한테 감시를 해서 위장취업자를 색출해내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저는 누구를 감시할 능력도 없고 그런 일을 할만큼 간이 크지도 않아요. 성태 씨. 저 좀 도와주세요. 성태 씨는 현장에 계시니, 누가 봐도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동향만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그걸 보고서에 넣어 감시하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하면 부장님이 제게 뭐라 하지 않고 안심할 거예요. 요즘 저는 제 밥줄이 끊길가봐 숨이 막혀요.

정희는 그에게 온전히 의지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착한 사람 김성태’의 등에, 관리부장의 매서운 시선을 피할 방패를 기대고 있었다.


민우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김성태’의 가면을 벗을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녀의 절박한 부탁과, 조금 전 국밥집에서 던진 정희의 농담이 그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이 진실된 동지에게는 진실을 말해야 했다.

민우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충청도 노동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결단과 책임감을 담고 정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희 씨!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정희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성태라는 사람의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네, 성태 씨. 말씀하세요.”

정희는 그의 진지한 태도에 의아해 하며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저는 김성태가 아니라 함민우입니다.”

정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이었다.

민우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몇 겁의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제 양심상 도저히 정희씨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정희 씨가 실망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저를 고발한다 해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방의 은은한 음악 소리만 공허하게 맴돌았다.


“함... 민우 씨?”

정희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어,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쥐고 있었지만, 잔이 떨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 자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민우를 응시했다. 지금 그녀의 눈빛에는 배신감,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가 지난 몇 주 동안 의지하고 신뢰했던 ‘순박한 광산 김가 종친’ 김성태가, 그녀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외부 침입자’이자 ‘위장 취업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희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관리부장이 오늘 아침 그토록 경고했던 ‘빨갱이’, ‘외부 침입자’가 바로 지금 그녀의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위험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과 불안을 털어놓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성태 씨는... 김성태 씨잖아요. 생산동... 그 베어링도 고쳐주시고...”

정희는 혼란 속에서 가장 사소하고 확실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려 애썼다.

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충청도 사투리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또렷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김성태는... 제가 공장에 들어오기 위해 만든 이름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경제학과에 다니고 있는 함민우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공장의 해고 노동자들과 남아 있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민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정희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진실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정희가 다방을 뛰쳐나가 관리부에 고발할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가 전에 만났을 때, 정희 씨는 저에게 ‘우리는 관리부 직원’이라고 선을 그으셨죠? 저는 그때 정희 씨의 갈등을 알았습니다. 정희 씨가 해고된 언니들을 남몰래 돕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정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가장 은밀한 선행까지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이 시장에 온 것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인가요”

정희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다는 듯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민우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정희 씨를 따라나선 것은 정희 씨의 안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희 씨에게 진실을 말하고, 동지로서 함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지’, 정희에게 그것은 너무나 낯선 단어다.

“관리부장이 정희 씨에게 ‘외부 침입자’'를 찾으라고 지시했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 침입자가 바로 저입니다. 제가 공장에 들어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생산동의 조직을 정비하고,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 목소리를 내도록 아무도 모르게 돕고 있습니다.

”정희 씨가 국밥집에서 농담처럼 던진 말, “혹시 ‘위장취업자’ 아니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더 이상 정희 씨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정희 씨의 양심을 이용하여 사소한 정보를 얻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희 씨의 신념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민우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지만, 정희에게 닿지는 않았다.

“저를 고발하셔도 좋습니다. 그만한 것은 이미 각오하고 들어왔습니다. 정희 씨가 회사에서 계속 월급을 받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정희 씨가 관리부의 방패가 아닌, 자신의 양심이 이끄는 길을 선택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금 이 공장과, 해고된 언니들의 투쟁에 정희 씨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민우는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강요나 위협도 없었다. 오직, 위험한 진실과 절박한 호소만이 담겨 있었다.

정희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의 진심 어린 눈빛 속에서 김성태의 순박함이 아닌 함민우의 뜨거운 신념을 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고발'과 '협력'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로 갈라져 폭풍처럼 회전했다. 고발은 생존이지만, 협력은 양심이었다. 그리고 그 협력은 위장 취업자 함민우와 함께하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될 터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다방의 음악 소리가 갑자기 멈춘 듯,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제가 고발하면 민우 씨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민우는 정희의 질문을 듣자마자, 그녀가 자신을 고발할 의사가 없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질문은 자신의 안위가 아닌, 자신 때문에 민우에게 닥칠 위험에 대한 염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신자나 밀고자가 던질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식어가는 커피 두 잔과, 그들 사이에 놓인 깨져버린 가짜 정체성을 남겨둔 채, 다방 문을 열고 어둠이 짙게 깔린 영등포 거리로 나섰다. 거리의 시원한 공기가 그들의 얼굴을 스쳤다. 민우는 즉시 관리부의 감시나 미행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듯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상황을 주도하는 리더의 것이었다.

제가 내일(22)부터 모레(23)까지 이철송교수님, 김성태교수님과 강원도 양양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다녀와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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