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24화 수아의 방문(1)
태종이 부마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한 직후, 할머니의 급작스러운 경고로 인해 홍성집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네 사람은 침통한 표정으로 막걸릿잔을 만지작거렸다. 태종의 이야기와 할머니의 불안감이 뒤섞여 술자리 자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홍성집 바깥에서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고 있는 듯 외마디 소리도 들리고 ‘유신철폐’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학생들이 골목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놈들아! 오늘 장사도 공쳤다. 어서 집으로 가!”
할머니의 장사를 돕는 딸은 분주하게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압대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곧 최루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 사람이 분주하게 짐을 챙겨 나가려고 하는 홍성집까지 매캐하고 톡 쏘는 냄새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계속해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서 나갑시다. 할머니 계산은 달아놔요.”
“그래 이놈들아! 데모에 휩쓸리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
밖으로 뛰어나온 태종이도 주먹을 불끈 쥐더니 ‘유신철폐’를 외쳤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어찌할 줄 모르던 영석이도 주먹을 쥐고 소극적으로나마 ‘유신철폐’를 외쳤다. 봉자도 정화도 마찬가지였다. 영석은 정화와 봉자의 팔을 붙잡아 가능한 정문에서 먼 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저쪽 골목길을 이용해 혜화동 쪽으로 빠져나가자!”
영석은 정화와 봉자의 팔을 잡고 태종이와 함께 혜화동 쪽으로 빠져나왔다. 최루탄 가스는 스멀스멀 혜화동까지 침범해 있었지만, 숨쉬기는 한결 편해졌다. 정화와 봉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눈물범벅이다 보니 화장이 지워져 얼룩덜룩했다. 영석이는 3월에 문무대에 입소하여 화생방을 경험한 바 있지만, 요즘은 그런 훈련이 필요 없다. 거의 매일 데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울대와 성대의 데모가 가장 극렬하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11월이 가까이 오고 있는데도 수업일수는 겨우 두 달이 채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혜화동인데도 성대 쪽에서 외치는 학생들의 구호와 경찰의 확성기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부마사태가 그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가에서 억눌린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다 보면 서울이라고 위수령이 발동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오늘따라 태종이로부터 들은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석은 혹시나 유신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석과 태종이는 정화와 봉자를 혜화동 국민은행 앞까지 데리고 와서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영석은 시위대에게서 자신이 잃어버린 용기를 엿보며 질투 어린 부러움을 느꼈고, 국가의 운명이 요동치는 이 순간에도 개인의 애정 문제에 발목 잡힌 자신의 이기적인 우유부단함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도서관 열람실이나 술집으로 숨어드는 자신을 비겁한 그림자처럼 느꼈다.
“오빠, 괜찮아?”
정화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영석의 얼굴을 살폈다.
“나는 괜찮아.”
“절대 눈 비비지 마! 가스 묻은 손으로 비비면 더 심해져.”
자꾸만 눈을 비비고 있는 봉자를 보며 영석이 말했다.
“괜찮아? 최루탄 가루 묻었을 거야. 절대로 옷으로 얼굴 닦지 마. 가스 입자가 더 퍼진대. 어서 화장실을 찾아서 찬물로 씻어야 해. 뜨거운 물은 안 돼, 모공 열리면 가스 더 스며들어!”
영석은 문무대에서 받은 화생방 훈련 시 배운 내용을 두 사람에게 알려줬다.
영석은 숨이 차서 말을 끊으면서도 정화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와 뺨에는 눈물과 땀이 뒤섞여 있었다. 큰 눈이 충혈되어 붉게 변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이야. 가서 흐르는 물로 10분 이상 계속 씻어. 절대 비비지 마. 알겠지?”
“화생방 훈련할 때 최루탄 가스를 맡았을 때는 눈을 비비지 말라고 했어.”
영석은 다시 한번 정화를 향해 주의를 줬다.
“이러다 정말 휴교령 내려지는 거 아니야? 무서워 죽겠네.”
봉자가 중얼거렸고, 태종은 담배를 꺼내려다 참았다.
“지금 시국이 장난이 아냐. 아마 며칠 안으로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영석이 너,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영석은 태종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의 시선은 정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격렬한 시위와 최루탄 속에서, 그녀의 ‘운명’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그의 뇌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서둘러 수원 가는 차를 타야 할 것 같은데?”
영석이 갑자기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수원까지 정화가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이 충분한데? 막걸리 마시고 전철 타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정화는 그리 급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아냐. 수원은 너무 멀어. 늦어지기 전에 어서 종로5가역으로 가서 전철 타야 해.”
“오빠! 오빠는 왜 자꾸 나를 보내려고 해?”
정화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영석을 쳐다봤다.
“내가 지난번에 전철 타고 수원까지 데려다줬잖아 너무 멀더라고. 내가 오늘은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혼자 보내야 하므로 내 마음이 급해서 그래.”
“그렇다면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전화가 없다니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그래”
“내가 연락하면 되잖아.”
“일방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나?”
“내가 연락할게.”
“그렇다면 손가락 걸고 약속해.”
영석은 난감했다. 단호하게 관계를 자르지 못하는 자신이 싫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정화가 싫은 것도 아니다. 정화는 그가 잊고 살았던 위험하고 강렬한 설렘이었고, 답답한 현실을 깨고 도망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수아에 대한 죄책감에 숨 막혔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수아는 그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약속이자, 힘든 현실을 견디게 하는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영석의 마음은 수아에게 돌아가야 하는 묵직한 의무와 정화에게 끌리는 새로운 충동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다만 정화의 직진 때문에 더욱 방어적 태세를 취하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석은 어느새 정화의 새끼손가락에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영석은 태종이와 봉자를 보내고, 종로5가역에서 수원행 전철을 타고 영등포역까지 정화와 이동하기로 했다.
“오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남자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시해 본 적은 처음이야. 이래 봬도 수원 바닥에서 나 쫓아다니는 남자들 많거든.”
“당연히 그랬겠지. 예쁘고 똑똑하고 리더십까지 있으니 어떤 남자들이 싫어하겠어.”
영석이 정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뭐가 좋다고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지난번 전철을 타고 가는데 오빠와 대화를 하면서 ‘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우선 나는 너무나 가난해.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실망할 거야.”
“오빠에게는 미래가 있잖아.”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울 엄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인데?”
“의지할 곳이 있어야, 무엇이든 시작하거나 이룰 수 있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출세하려면 그럴 만한 배경이나 인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울 엄마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늘 뒤에 ‘그래도 뚝심이 있으면 언덕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셨어. 오빠!, 오빠는 남에게 빌붙어 출세할 사람이 아니잖아? 오빠가 법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겨우 남의 배경이나 인맥을 밟고 올라서기 위해서야? 오빠의 뚝심과 능력이 오빠를 지탱할 언덕이 될 거야. 그리고 만약 오빠의 그 언덕이 혼자 힘으로 버티기 힘들다면, 내가 언덕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나?”
그녀는 영석을 향해 강한 확신과 부드러운 유혹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영석은 억지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단호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조심해서 가.”
영석은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누나가 가리봉동으로 이사할 거라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정화가 던진 마지막 말, “내가 언덕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나?”라는 말이 계속해서 영석의 뇌리에서 맴돌았다. 수아가 이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봤으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화의 말에는 낡은 책임감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작을 하라는 맹렬한 유혹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유혹은 방금 전 홍성집 앞에서 겪은 시대의 격변과 묘하게 겹쳐졌다.
“결국 정화는 나에게 ‘수아’라는 유신 체제를 버리고, ‘자유’라는 새로운 운명으로 갈아타라고 부추긴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면서 영석은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어둠에 잠긴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 불빛들이 자신이 짊어져야 할 궁핍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왜 ‘뚝심’만으로 언덕을 만들 수 있다는 정화의 낭만적인 가능성을 선택하지 못하는가? 결국 나는 저 발랄한 희망 대신, 춥고 습한 판잣집의 현실을 선택할 만큼 겁이 많은 자가 아닐까?”
영석은 자신이 법학도로서 시대 상황을 외면하고, 데모하는 학생들의 시대의 목소리 대신 가장 사적인 문제에 발목 잡혀 있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오늘 최루탄 냄새 속에서 느낀 공포와, 수아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죄책감이 뒤섞여 그의 심장을 계속 찔러댔다.
버스가 오목교 근처에 다다르자, 영석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그가 책임이라는 이름의 언덕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정화의 존재는 잠시 동안 그가 꿈꿀 수 있었던 화려하지만 불안한 신기루였고, 이제 그 신기루는 현실의 압력 앞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죄책감과 의무감으로 무거웠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을 향해 넘어가고 있었다. 영석이 자신의 판잣집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낡은 나무 대문 앞, 좁은 마루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수아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숙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고, 수아는 그런 숙희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영석은 도망칠 수만 있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앗! 오빠다! 오빠!”
영석이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숙희가 다급하게 영석을 부른 소리가 들렸다.
수아에게 숙희는 '영석 오빠가 사는 동네의 귀여운 아이'일뿐이었으나, 영석에게 숙희는 '자신의 궁핍한 현실을 아는 목격자'였다. 이 두 사람의 조합은 영석이 정화와의 일탈과 판잣집의 현실을 모두 숨기고 싶었던 두 세계의 충돌 그 자체였다.
수아의 방문과 숙희의 시선이 만들어낸 조합은 영석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그의 셔츠에서는 아직 최루탄의 희미한 잔향과 홍성집 막걸리의 냄새가 섞여 풍겨 나오는 듯했다.
숙희의 외침을 들은 수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과 절박함이 뒤섞인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삼춘!”
수아가 벌떡 일어나 마루를 내려와 영석에게 달려왔다. 영석은 몸을 피할 수도, 그녀를 반갑게 맞이할 수도 없었다. 수아의 품에 안기는 순간, 영석은 최루탄 냄새와 정화와의 대화가 수아에게 들킨 것 같은 두려움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삼춘!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수아의 방문은 영석의 내면에 안도감과 수치심이라는 두 개의 격렬한 파도를 일으켰다.
최루탄 냄새와 정화의 맹렬한 유혹, 그리고 늦은 귀가에 대한 죄책감으로 짓눌려 돌아온 그에게, 수아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잠재울 ‘유일한 닻’이었다. 그녀가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드는 순간, 영석은 자신이 버리려 했던 사랑과 책임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했다. 영석은 수아에게 의지하고 싶은 본능적인 갈망을 느끼며 그녀를 반겼다.
그러나 그 기쁨은 숙희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영석이 수아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궁핍한 현실이 그녀의 시선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이다. 수아의 얼굴에 안도감이 걷히고 충격과 연민이 떠오르는 것을 본 순간, 영석의 마음속에서는 자존심 있는 남자로서의 자아가 무너져 내렸다.
“뭐 하러 왔어?”
영석은 속마음과 달리 나가는 자기의 말에 스스로 당황했고, 수아는 반가워할 줄 알았던 영석의 냉랭한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미안해. 미리 연락하고 와야 했는데, 전화가 없으니 연락할 길이 마땅치 않고 삼춘은 보고 싶고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도 해서 무작정 주소만 들고 택시 타고 찾아왔어. 화내지 마.”
영석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고 수아는 영석의 그런 모습에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영석은 벌거벗은 몸을 들키기라도 한 양 부끄러운데 수아의 출현이 너무나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달리 만날 방법을 찾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골이 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수아 역시 영석이가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간다고 못 만나고, 문무대 입소한다고 못 만나고, MT 간다고 못 만나는 등 오히려 영석이 재수할 때보다 자주 못 만나는 기분이 들어 조금 화가 나 있는데, 그렇다고 영석이가 편지를 자주 보내 만나자는 연락도 하지 않으니 한번 찾아가 보자는 마음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서울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놀랐다. 그래서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어떤 귀엽고 예쁜 계집아이가 집에 들어오다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자기를 도둑이라고 오해할까 봐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숙희는 영석과 수아를 번갈아 보며 낯선 여인의 등장에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숙희야, 너 왜 아직 안 들어가고 여기 있어. 어서 들어가.”
영석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날이 서있었다.
숙희는 영석의 싸늘한 반응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아를 가리켰다.
“이 언니가 오빠 여자 친구야? 엄청 예쁘다!”
이 순수한 질문은 영석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했다. 정화와의 만남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영석에게, 수아가 ‘여자 친구’라는 사실을 숙희라는 가장 궁핍한 현실의 증인 앞에서 확인당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수아는 숙희의 말에 밝은 표정을 지으며 영석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곧 영석 뒤편, 낡고 허름한 판잣집 대문으로 옮겨갔다. 해질 녘의 붉은빛이 판잣집의 낡은 나무와 희미하게 적힌 문패를 비추고 있었다. 영석은 수아의 눈에서 정화가 상징하는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을 옭아매는 무거운 현실을 보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수아는 영석의 태도에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이 잘못이라 하더라도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방으로 들어가자는 말 한마디 없이 골이 나 있는 영석의 태도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나 이만 가볼게.”
수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제야 영석의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저녁 먹고 가야지.”
“삼춘은 이미 저녁 먹었지?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말이야.”
“응! 태종이라는 친구랑 막걸리 한잔 마셨어.”
“영석이 왔구나?”
정희도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오는 중인데 영석은 누군가 누나를 배웅하고 떠나는 실루엣을 보낸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숙희 학교 잘 다녀왔어?”
“응! 이분은 오빠 여자 친구래.”
“뭐? 여자 친구?”
정희는 처음 보는 낯선 여성을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수아라고 합니다.”
“아! 네.”
정희도 수아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머리를 최대한 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옥수동 사는 경숙이 친구예요.”
“우리 조카 경숙이?”
정희가 더욱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경숙이가 소개해 준 친구야.”
그제야 영석이 나서서 수아를 정희에게 소개했다.
“나 재수할 때 많은 도움을 준 친구야.”
“그래요. 너무 반가워요. 그런데 우리 집이 너무 누추해서 어쩌나?”
“천만에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긴 데요 뭐.”
“여하튼 우선 방으로 들어갑시다. 숙희야! 너도 엄마 오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밥도 먹고 숙제도 해.”
“우와! 신난다. 숙제는 나중에 하고 예쁜 언니랑 놀면 안 될까?”
숙희가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영석은 누나 정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숙희가 수아를 ‘여자 친구’라고 외친 순간을 하필 누나가 목격한 것이다. 그는 수아와의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이처럼 가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나와 이웃에게 모두 노출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좁은 마루를 지나 허리를 최대한 구부리고 수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법서와 영석이 재수생일 때 봤던 참고서가 쌓여 있었고, 아침에 두 남매가 급하게 나간 듯 이불과 베개가 제멋대로 놓여 있었다.
정희는 수아를 향해 연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수아 씨! 집이 너무 누추해서 정말 미안해요. 그래도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니, 수아 씨 마음씨가 참 곱네.”
정희는 동생의 초라한 현실을 대신 사과하는 듯했다.
수아는 영석의 당황한 표정을 살피며 애써 밝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언니. 저는 그냥 삼춘 얼굴만 봐도 좋아요.”
수아의 말은 순수했지만, 영석에게는 자신을 향한 헌신을 누나 앞에서 선언하는 듯 느껴져 묘한 압박감을 주었다.
문제는 숙희였다. 숙희는 낯선 미인의 등장에 모든 관심을 빼앗긴 채, 수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언니! 언니는 어떻게 영석 오빠랑 만났어? 영석 오빠는 맨날 공부만 하는데!”
숙희의 천진난만한 질문은 영석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영석은 숙희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정희는 숙희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며 입을 막았다.
“얘, 숙희야! 둘이 이야기하는데 너같이 어린애가 끼어들면 안 돼.”
“치! 나도 다 안다고요.”
숙희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영석은 방구석에 쌓인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방이 공부하는 공간이자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어막이 되기를 바랐지만, 지금 이 방은 수아의 등장으로 인해 가장 사적인 부분이 노출된 무대가 되어버렸다.
그의 시선은 잠시 수아에게 닿았다. 수아는 그의 낡은 방과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며 경악 대신 안쓰러움과 애정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영석은 홍성집에서의 모든 일을 떠올렸다. 최루탄 냄새, 정화의 도발, 태종의 경고, 그리고 그가 정화에게 했던 단언, ‘내게는 이미 언덕이 있다.’ 등등.
그가 말한 ‘언덕’은 바로 지금 이 방에 들어와 있는 수아였다. 영석은 정화의 유혹 앞에서 책임감을 선택했지만, 그 책임감이 그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영원히 닫아버릴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영석은 괜히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나 정희와 숙희가 있는 이 상황에서, 그는 수아에게 자신이 겪었던 내면의 격랑이나 정화의 존재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 복잡한 현실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잠시 후, 정희는 부엌으로 가서 간단한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수아는 그런 정희를 돕겠다며 따라나섰다. 자매처럼 부엌에서 나지막이 대화하는 두 여인의 모습에 영석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좁은 방에는 영석과 숙희만이 남았다. 숙희는 여전히 수아가 놓고 간 가방을 힐끗거리며 영석을 바라봤다.
“오빠, 언니 정말 착해 보인다. 그렇지?”
영석은 수아의 질문에 대답할 힘도 없었다. 하루가 정말 길게 느껴졌다. 부엌에서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숙희야! 언니 오빠 귀찮게 안 혔지?”
곰소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디 이분은 누구시당가?”
“영석이 여자 친구래요.”
영석의 속도 모르는 정희가 까르르 웃으며 곰소댁의 질문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