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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5화 유신의 끝자락 (2)

정희의 삶은 두 개의 얇은 유리판 사이에 갇힌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낮에는 관리부장에게 생산동 여공들의 사소한 동향,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 윗옷을 갈아입었다.’, ‘콧노래를 불렀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적절히 꾸며낸 보고서를 제출하며 감시자의 가면을 썼다. 밤에는 영등포시장의 골목이나 낡은 다방에서 ‘함민우’를 만나 관리부의 동향을 알려주거나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주는 동지로 변신했다. 물론 이들이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서로의 근무시간이 다르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따라서 정희는 영등포시장의 ‘희다방’에서 민우를 기다리며 DJ에게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윤시내의 ‘열애’,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 혜은이의 ‘제3한강교’나 ‘감수광’,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등의 노래를 신청해 듣거나, Donna Summer의 ‘Hot Stuff’, Village People의 ‘Y.M.C.A’, Michael Jackson의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Billy Joel의 ‘My Life’ 등 디스코와 록 장르의 히트곡들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정희가 자주 듣는 곡은 바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다. 특유의 애잔함과 구슬픔이 깊게 배어 있어 정희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비음 섞인 떨림, 서정적인 가사와 단조의 멜로디가 결합한 한국적인 ‘한’의 정서, 흔들림 없이 선율을 장악하면서도 감정을 응축시켜 전달하는 단조의 창법, 트로트와 발라드의 경계를 허문 독특한 음색과 창법이 정희는 정말 좋았다.


오늘도 ‘희다방’에서 만나 정희와 민우가 나누는 대화는 결코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만은 아니었다.

“오늘 관리부장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부산과 마산에서 빨갱이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여서 위수령인가 계엄령인가가 내려졌다더라구요. 중앙정보부가 ‘YH 무역 사건’보다 더 심각한 사태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던걸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이 10월 26일이니 정확하게 열흘째예요. 우리 안에서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유신 독재가 곧 끝날 거라는 ‘희망’입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정희 씨.”

민우의 말투는 언제나 단정하고 명료했으며, 정희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하나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주었다. 그가 말하는 ‘정당한 권리’와 ‘민주주의’라는 단어들은, 정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회사와 국가의 부조리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진실처럼 느껴졌다. 관리부장에게서는 날카로운 명령과 의심의 소리만을 들었던 그녀는 민우로부터 처음으로 자신의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인정과 존중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을 공유하는 시간은 사랑을 싹 틔우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었다. 정보가 담긴 쪽지를 건네는 순간 스쳤던 손가락의 찰나, 다방 구석에서 감시를 피하며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던 순간의 정적, 그리고 늘 민우가 먼저 확인하며 정희를 어둠 속으로 숨겨주던 헤어짐의 뒷모습. 그 모든 행위는 그들 사이의 긴장과 유대감을 팽팽하게 엮어냈다. 정희는 민우의 신념에 감화되었고, 민우는 정희의 이중적인 삶 속에서 피어난 용기와 섬세함에 매료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연애라기보다는, 시대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 공모이자 구원이었다.

“네! 저와 같은 위장취업자들은 해고된 노동자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고 노동조합을 재결성하거나 강화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합니다. 다시 말해, 노동법 지식, 조직 운영 방식, 투쟁 전략 등을 공유하며 노동자들이 체계적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입니다. 특히, 공장 내부의 열악한 현실을 분석하고 자본의 착취 구조를 설명하는 ‘의식화 교육’을 비밀리에 진행하여, 노동자들이 단순히 임금 문제뿐 아니라 근본적인 노동 해방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정희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민우와 함께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공장 담벼락 안에 갇히지 않도록, 외부 세력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종교계, 대학생 운동권, 재야 민주화 인사들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해고 투쟁의 부당함과 노동 현실의 비참함을 사회 전체에 알리는 데 주력하는 것이죠. 이를 통해 해고 노동자들의 문제가 단순한 ‘노사 분규’가 아닌 정의와 인권에 관한 민주화 운동의 일부임을 부각하고, 정부와 자본을 압박할 수 있는 여론 형성을 유도합니다.”

“아니 제가 궁금한 것은 해고된 언니들을 어떻게 믿느냐는 거죠?”

민우의 대답을 듣고 있으면서 정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해고된 언니들이 혹시라도 잘못해서 민우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투쟁 과정에서 치밀하고 장기적인 투쟁 전략을 제시하는 참모 역할을 해요. 즉 회사의 반응과 정부의 동향을 예측하며 노동자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죠. 그리고 이런 일은 아주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어요. 제가 근무하는 동안 정희 씨도 저의 진짜 모습을 몰랐잖아요.? 해고된 분들이 정희 씨와 친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들에게 철저한 당부를 했습니다. 아무리 정희 씨를 믿는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절대 모른 체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해고로 인해 당장 생계가 어려워진 그분들의 가족들을 위해 비공식적인 모금 및 물품 지원 통로를 만들어 경제적인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병행하고 있고, 그분들은 저 같은 사람들을 정신적 지주이자, 투쟁의 나침반, 그리고 긴급한 생계 지원의 통로로 알고 있으므로 절대 비밀을 누설하지 않습니다.”

정희는 처음에 해고된 언니들이 괘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매사에 조심하셔야 해요. 이상우 관리부장이 중앙정보부에서 위장 취업자를 색출해 내기 위해 우리 회사에도 프락치를 심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네 항상 조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정 아이들이 우리 운동권 친구들을 독일 등의 국가에 유학시켜 주겠다거나 경제적 도움을 주겠다고 회유하는 경우가 있어요. 한때 동지였던 친구들이 그렇게 변절할 때 가장 슬퍼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들이지만, 민우 씨의 존재를 알고 나서는 그 언니들조차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정희는 순간 사랑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그 견고한 의심의 경계선을 오직 민우라는 존재만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와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위험쯤은 이미 각오하고 시작하는 거예요.”

정희는 그 말을 듣고도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혹시라도 민우가 꼬투리를 잡혀 끌려가게 되면 어쩌나. 중앙정보부의 무자비한 고문 앞에 혹독한 시간을 보내게 되지는 않을까. 아니, 혹여라도 그의 젊음이 차가운 감옥 속에서 송두리째 갇혀버리지는 않을까 너무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곧은 눈빛을 마주할수록, 그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그 짐 때문에 자신이 느낄 고통이 얼마나 깊을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민우 씨는 그렇게 각오하고 시작하셨다지만, 저는 그런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아요.”

정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혹시 민우 씨가 잡혀가지는 않았을까 봐, 혹시 회사에서, 거리에서,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두려워지곤 해요.”


민우가 갑자기 정희의 손을 잡았다. 사실 그동안 정희와 민우는 손 한번 잡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으니, 정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런데 민우가 정희를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와락 안았다. 정희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사정없이 나대기 시작했다. 정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가 정희 씨를 사랑해도 되나요? 아니 사랑하고 있나 봅니다.”

정희는 민우의 뜨거운 숨소리와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민우 씨는 대학생이지만 저는 고졸인데 어떻게?”

정희가 그의 학벌을 언급하자 민우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마치 그녀의 어깨 위에 놓인 시대의 짐과 신분의 장벽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는 듯이. 정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고 단단했다.

“정희 씨.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시대는, 대학 졸업장이나 집안 배경 같은 하찮은 것들을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민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저는 위장 취업을 위해 대학생 신분을 버리고 이곳에 왔어요. 제게 중요한 것은 제가 가진 지식과 신념이지, ‘학생’이라는 껍데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희 씨에게는 그 어떤 대학생도 가질 수 없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요.”

그는 정희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희 씨는 매일 목숨을 걸고 관리부장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고, 다시 목숨을 걸고 저에게 진실을 전해주는 동지입니다. 어둠 속에서 저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가장 핵심적인 존재예요. 이 투쟁에서 정희 씨의 역할은 제 역할만큼이나 중요하고, 때로는 저보다 더 위험하죠.”

민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시 한번 자신의 진심을 강조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학력이나 신분에 갇힌 정희가 아닙니다. 낡은 다방에서 심수봉 노래를 들으며 시대의 아픔을 곱씹고, 위험을 알면서도 옳다고 믿는 일을 해나가는 정희라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학벌의 차이 같은 건 의심의 그림자보다도 하찮은 거예요.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저를 걱정해 주는 당신의 그 마음이, 저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의 말이 끝난 후에도 정희는 한동안 민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심장 소리는 여전히 쿵쾅거렸지만, 그녀의 두려움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대학생과 고졸이라는 세상의 경계가, 이 암울한 시대의 투쟁과 사랑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희 씨는 언제든지 대학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야간대학에 다녀도 되잖아요?”

정희의 뺨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정희는 그런 모습을 민우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얼굴을 민우 가슴에 파묻어버렸다. 마침 라나 에 로스포의 ‘사랑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희가 가장 바라는 것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전교 1, 2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허접스러운 직장에서 정말 꼴 보기 싫은 관리부장의 욕을 얻어들으며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히곤 했다. 그런데 민우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의지가 생기고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나저나 동생 영석이를 한번 보고 싶은데.”

다시 떨어져 앉은 민우가 정희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왜요?”

솔직히 정희는 민우를 영석이에게 아직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냥 동생에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민우가 굳이 집까지 바래다준다는데도 영석이 눈에 띄지 않게 대문 앞에서 굳이 그를 보냈다.


같은 시간 영석은 수아와 함께 원남동에 있는 ‘시랑’이라는 찻집에 앉아 있었다. 오후 2시에 성대 입구 ‘정일품’에서 간단히 술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 평소 영석이가 좋아하는 ‘시랑’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영석이가 그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들어서는 순간 사면 가득 시집들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삼춘! 우리 이 길을 걸어갔던 기억이 나?”

“당연하지. 체력장 끝난 날. 여기 원남동에 와서 전에 살던 집이리며 대문 앞 계단을 가리켰던 적 있지”

“맞아, 맞아.”

수아는 기억해 줘 고맙다는 듯이 폴짝폴짝 뛰었다.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이야기도 해줬어.”

“그래! 그래!”

“와! 삼촌 기억력 대단한데?”

“그날 이태원에서 쌍문동까지 걸어갔는데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 모든 게 다 기억이 날 수밖에.”

수아는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배를 부여잡았다.

“이제 쌍문동으로 이사 왔으니 오늘 또 쌍문동까지 걸어갈까?”

걷기 좋아하는 수아가 다시 걸어갈 채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냐. 아냐. 여기 쌍문동 가는 버스 아주 많아.”

영석은 두 손을 저으며 절대 걸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삼춘네 학교 매일 데모한다고 우리 큰오빠가 없애버려야 할 대학이라던데?”

“그래? 오빠가 없앨 수 있다면 없애라고 해.”

영석은 수아의 큰 오빠라면 능히 그런 소리를 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 오빠는 안녕하신가?”

“얼마 전에 부모님이랑 면회를 다녀왔는데 ‘녹화사업’ 대상이라고 하더라고.”

영석은 ‘녹화사업’이란 용어를 문무대 갔을 때 주변의 친구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녹화사업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자꾸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해주지 않더라고. 그런데 돌아오면서 우리 아빠가 녹화사업은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일이라고 하셨어.”

영석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면 수아가 엄청나게 걱정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그러나 수아는 눈치가 매우 빨랐다.

“우리 오빠 눈치가 심상치 않았는데 삼춘도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아는 게 있으면 말해줘.”


수아의 날카로운 질문과 걱정스러운 눈빛에 영석은 더 이상 진실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춘 후 수아를 향해 한껏 몸을 기울였다.

“아버님 말씀처럼 단순하게 ‘민둥산에 나무 심는 일’이라면 오빠가 왜 그렇게 불안해 했을까?”

영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녹화사업이라는 건 나무를 심는 게 아니라, ‘불온한 사상’을 가진 학생들을 군대로 끌고 가 사상을 ‘녹화(綠化)’, 즉 푸르게 정화(淨化)시키겠다는 군부의 속셈이야. 즉 용공, 좌경, 불순한 사상 등 뻘간 물이 든 학생들을 군대에 강제징집하여 사상교육과 회유, 협박 등을 통해 정권에 순응하는 건전한 사상, 다시 말해 파란 물로 바꾸어 사회에 내보내겠다는 의도인 것이지.”

수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영석은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1971년에 ‘교련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지도자급 학생 200여 명이 강제입영당한 것이 시초래. 주로 시위 전력이 있거나 운동권 활동을 했던 대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거지. 공식적인 군입대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명단을 만들어서 비공개적으로 끌고 가는 거야. 심지어 병역 면제자나 신체 조건 미달인 학생들까지 잡아넣었어.”

“그, 그럼. 군대 내에서는 뭘 하는데?”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상적인 군 생활이 아니야. 군 당국은 이들을 ‘사상 개조 대상’으로 여겨. 일과 시간 외에 강도 높은 사상 교육을 강요하고, 과거 활동을 반성하는 ‘전향서’나 ‘각서’를 쓰게 압박한다더라. 문제는 이게 정신적인 고문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야.”

영석은 침을 삼켰다.

“군대 내에서 이들은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당연히 심한 구타와 가혹행위,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게 돼. 주변 동료들에게 감시당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이들을 제대 후 ‘프락치’로 활용하기 위해 회유하고 압박을 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 죽거나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게 되는 친구들도 나왔고.”

영석은 수아의 손을 잡고 위로하듯 힘을 주었다.


“오빠는 그곳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커.”

영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모르고 혼자 걱정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어. 나는 그저 수혁이 형님이 그곳에서 무사히, 그리고 사상에 굴하지 않고 잘 버텨내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야. 그저 몸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부모님께는 이런 말씀 절대 하면 안 돼.”

수아의 눈이 붉어졌다. 영석은 괜한 말을 했나 싶어 후회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자주 오빠 면회를 가야겠어.”

“수혁 형님은 잘 견뎌낼 거야. 오빠가 웬만한 일에는 흔들릴 사람이 아니야.”

“그랬으면 정말 좋겠어.”

이제 수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삼춘! 답답한데 나가서 걸을까?”

“그래. 광화문으로 가서 시청 쪽으로 걸어갈까? 아니면 종로 5가를 거쳐, 청계천으로 가다가 퇴계로 쪽으로 갈까?”

“광화문으로 가자.”

두 사람은 창덕궁을 지나 안국동을 거쳐 광화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광화문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영석은 ‘불란서 문화원’ 쪽을 바라봤다. 이미 저녁 7시 20분이니 영석은 불란서 문화원이 오늘은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앙드레김 매장의 쇼윈도만 불빛이 환했다. 서늘한 가을 저녁 공기가 감도는 경복궁과 청와대 주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경복궁 주변은 일상적인 고요함 속에 깊숙이 묻혀 있었고, 수많은 역사적 격변을 겪은 광화문과 궁궐의 담장은 그림자 속에 잠겨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복궁 앞을 지나는 차량의 불빛조차 나른하게 느껴졌으며, 청와대 입구 초소의 경비병들은 규칙적인 걸음으로 순찰할 뿐, 그 어떤 비상 상황도 예고되지 않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지극히 평화로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곰소댁은 고창댁과 좌판을 정리한 후 최사장네 국밥집에 앉아 소주 한 병만 나눠 먹기로 했다. 어서 집에 가서 숙희를 챙겨야 하는데 고창댁이 어쩐지 기분이 매우 우울하다면서 자꾸 붙잡으니 어쩔 수 없이 주저앉은 자리였다.

“내가 가을을 타는 개벼.”

“아이고 이 여편네 찬바람이 솔솔 불어온 게 가슴팍에 구멍이 팍 뚫려 버려 갖고 허전한가 비다. 남자 생각나서 그러제?”

곰소댁의 능글맞은 농담에 고창댁은 힘없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뚝배기 국밥 위에 얹어진 파채만 휘휘 저을 뿐, 좀처럼 술잔을 들지 않았다.

“아이, 남자 생각은 무슨. 쉰 살도 넘은 아지매한테. 팍 늙어버린 이 얼굴 누가 쳐다본다든가?”

고창댁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억척스러움 대신 깊은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곰소댁은 그제야 고창댁이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곰소댁은 소주잔에 술을 가득 채워 고창댁에게 건넸다.

“자, 한 잔 털어 넣어봐. 그래야 속이 풀린당게. 오늘따라 왜 그러는겨. 뭔 일 있어?”


고창댁은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쓰라린 느낌에 고창댁은 작게 ‘크으’ 소리를 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영숙이는 잘 있다고 허는디. 어째 내가 영 불안해서 그려.”

고창댁은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아니, 젊어서 남편 복이 없어 홀로 남겨진 것도 서러운데, 이 노릇한 나이에는 자식 복이라도 있어야지 않겄어? 근디 갑자기 엊저녁에 영숙이란 년이 보따리 싸들고 친정집이라고 찾아왔어.”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고창댁이 힘이 없었다. 바쁘다 보니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변서방이 노름을 헌다고 싸웠는 개벼.”

“남자들이 민화투 좀 친 걸 갖고 뭘 그런당가?”

듣고 있던 최사장이 끼어들었다.

“민화투만 친다면 누가 뭐라 한당가? 도리짓고땡이나, 섰다. 고스톱을 허니까 그러는 거 아녀.”

아까까지 눈물을 훔치던 고창댁이 화를 벌컥 냈다.

“맞어. 화투 치는 놈들은 손모가지를 잘라버려야 헌당게.”

곰소댁이 고창댁을 위로한답시고 맞장구를 쳤다.

“워따! 남의 사우 손모가지 잘라버리면 좋겄다.”

고창댁은 언제 사위 흉을 봤나 싶게 발끈했다.

“아따! 남은 열한 살짜리 가시내 키워서 언제 시집보낼까 걱정인디, 노름허는 사우 놈 있다고 위세 떠냐?”

“내가 언제 위세를 떨었다고 그려?”

고창댁이 곰소댁을 바라보며 클클거렸다.


“워메! 벌써 7시 40분이네. 우리 숙희 배창시가 등거죽에 붙어버렸겄다야. 나 얼른 갈라는디 더 마실 거여?”

“아녀. 나도 가야 혀. 영숙이란 년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있을 틴디 가봐야제.”

거리는 이미 짙은 늦가을의 정막에 잠겨 있다. 활기로 가득 찼던 낮의 잔해만이 을씨년스러운 공기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상점들은 대부분 셔터를 내리고, 간혹 남아있는 몇몇 가게의 누런 백열등만이 좁은 골목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그 빛조차 힘이 없어 금세 어둠에 먹힐 듯 희미하다. 고창댁이 막 정리한 좌판 자리에는 젖은 신문지와 생선 비늘의 은빛 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곰소댁이 끌고 가는 손수레 바퀴 소리만이 텅 빈 시장 바닥을 긁고 있다.

“내일은 날이 좀 따뜻해야 할 텐디. 올해는 웬수놈의 추위가 일찍 와버린 것 같어.”

곰소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고창댁은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그러게 말여. 날씨가 쌀쌀헌게 사람들 발길도 일찍 끊겨버리잖여.”

내일 아침에는 다시 이 시장이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녹화사업 '이라는 명칭은 전두환 정권시대에 붙여졌으나 그 뿌리는 박정희정권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박정희 정권시대에도 녹화사업이 있었던 것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밝힙니다.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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