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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묵을끼라

(실용주의자의 식사법)

by 김미현


저녁을 만들 힘도, 차릴 힘도 하나도 없었다.

기운은 없는데 배는 또 고팠다.

순간, 냉동실의 피자가 떠올랐다.


대충 때우고 말자는 심산이었다.

혼자만 먹을 수는 없으니, 괴산아저씨에게도 물었다.


“보소. 피자 묵을래? ”


대답은 당연히 예스일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똑같이 네 조각을 먹어 치웠다.

하지만 아저씨는 접시를 들고 갈피를 못 잡았다.


조미김은 썰어 두었고,

하얀 쌀밥은 이제 막 취사 버튼에서 ‘보온’으로 넘어갔다.


그때, 들으라는 듯이 아저씨가 말했다.

“안묵을끼라.”

“거짓말하지 마라.”

“진짜 안묵을끼라.”


그러곤 피자 먹던 접시를 들고 주걱을 집더니,

“아이고 뜨거버라!” 하며 밥을 세 번 퍼냈다.


젓가락은 필요 없단다.

자기는 실용주의자라나.

손으로 김을 들고 쌀밥을 감싸며 연신 입으로 넣는다.


“인도사람이가, 뭐꼬?”

“나는 실용주의 사람이라.”


게눈 감추듯 밥을 먹더니,

이내 접시를 내려놓고 덧붙인다.


“딱 세 번 훑어서 밥을 펐데이.”


“내가 다 봤는데 뭘 훑노. 훑기는!”

“아이라, 진짜 훑은 거라.”


그래. 훑지 않았으면

밥통에 밥이란 밥은 다 퍼버렸겠지.


깔깔 웃는 아저씨였다.


“내가 설익은 밥 좋아해서 훑어준 거라.

니는 알맹이를 묵어라.”


‘알맹이를 묵으라니… 이게 나름의 애정 표현인가?’


웃음이 터져 밥을 못 먹고 있던 나에게

그는 물었다.


“왜 못 묵는데? 소화 안 되나?

내가 무주까?” (먹어줄까?)


다이어트 중이라는 그 아저씨는

독일에만 오면 입이 터진단다.


“내 원래 마이 묵고 그런 사람 아니라.

내는 소식쟁이라. 니가 밥을 해서

그냥 묵어주는 거라.”


“뭐라카노.“

“진짜라. 내는 진~~~~ 짜 소식쟁이라.”


이 아저씨의 ‘소식(少食)’의 정의는 무엇일까?


그는 오늘도 나를 웃겼다.


‘열두 살이 선택한 이민’을 다 쓰고,

며칠 멍하니 앓던 나를,

이 아저씨가 다시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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