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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충격은 사소하게 온다.

1부(가짜이민)

by 김미현


장시간 비행은 우리에게 고역이었다.

다른 승객들이 고개를 떨구고 잠에 빠져들 때, 우리는 멀뚱멀뚱 눈을 뜬 채로 자리를 지켰다.


나는 원래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에서 잠을 못 자는 체질이다.

비행기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그 불편한 기질을 아들이 고스란히 닮았다.

닮아도 왜 하필 이런 걸 닮았는지.


좁은 좌석에 묶인 채, 열몇 시간을 뜬눈으로 버티고 나니 눈은 벌겋게 충혈됐고, 다리는 퉁퉁 부었다.

몸은 무겁고 정신은 멍했다.


그런 상태로 독일 공항에 내리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표지판은 전부 독일어였다.

안내방송도 단어 하나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핸드폰 배터리는 3%.

와이파이도 없었다.

아이는 옆에서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이 났다.


낯선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한국과는 다른 온도, 공기의 밀도, 귀를 스치는 독일어 억양까지.

‘아, 정말 내가 다른 나라에 와 있구나.’

그제야 실감이 났다.


비행기 안에서 버티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긴장이 시작됐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한밤중.

첫날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공동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집 문은 나왔는데, 그 현관이 열리지 않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아, 진짜 왜 이래. 다 돌렸잖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내 손에서 열쇠는 이미 ‘돌림 노래’ 신세였다.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작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엄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우리는 지금 공동현관 앞에 갇혔다.

‘웬 구닥다리 유물 열쇠가 속을 섞이다니.

지금 21세기라고요!’


속으로 씩씩거리며 열쇠를 또 돌렸다.


그때, 윗집 아기엄마가 아기를 안고 내려왔다.

급히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녀는 시큰둥하게 열쇠를 꽂았다.


딸깍—. 단번에 열린 문.


그녀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내 손에서는 왜 그렇게 안 열리던 게,

그녀 손에선 왜 그렇게 쉽게 열렸을까.


열쇠 하나로도 ‘여기 사람’과 ‘이방인’이 구분되는 것 같았다.

작은 열쇠 하나가 우리를 단번에 ‘이방인 인증’ 해버렸다.




문제의 문은 열렸지만, 진짜 충격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빵집으로 향하는 길,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우리를 따라왔다.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다.

하지만 빵집에 들어선 순간, 그게 우연이 아님을 확실히 알았다.


그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음날이 되고,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상황은 같았다.

우리의 첫 도시, 그곳에 머문 3일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아시안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빵집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오직 우리 둘만 동양인이었고, 그 사실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떤 할머니는 고개를 거의 180도로 꺾어 우리의 동선을 따라왔다.

나는 순간, 내 뒤에 뭐라도 있는 줄 알고 돌아볼 뻔했다.


심지어 유모차 속 아기까지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전원 시선 풀가동.


알록달록한 눈동자들이 우리 모자(母子)를 따라다녔다.

궁금함 같기도 하고, 낯섦 같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먼저 웃으면 황급히 시선을 거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모두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너희가 여기는 어떻게 왔니?”


그 질문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듯했다.

원래 외향적이지 않은 나에게는, 그 눈빛들이 은근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는 빵집에서 영어로 주문했다. 떨 이유는 없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빵을 고르는 일이 이상하게 어색했다.


한국에서도 빵을 자주 먹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진열대에 놓인 수십 종의 빵은 왠지 시험지처럼 느껴졌다.


계산대 앞에 사람들이 소시지처럼 길게 늘어섰다.

‘역시 독일은 빵의 나라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결국 아무거나 집어 들고 계산을 마쳤다.

손엔 빵 봉지가 들렸지만, 마음속엔 묘한 질문만 남았다.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가벼운 물음은,

사실 앞으로 계속 따라붙을 무거운 질문의 시작이었다.



#문화충격 #독일 #이방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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