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확장된 감각, 망원경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한다. 인간은 감각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중에서도 시각은 단연 압도적인 지배자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의 80% 이상은 시각에 의존하며, 우리의 뇌 또한 이 방대한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강력한 감각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가두는 정교한 동굴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평생 동굴에 갇힌 사람은 동굴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고 그 사물을 판단하기 때문에 동굴 밖에서 본 원래 사물과는 다르게 인식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눈이 보여주고 뇌가 해석하는 대로 세상을 인식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감각의 한계 안에서 재구성된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갇힌 동굴의 첫 번째 벽은 ‘가시광선’이라는 지극히 좁은 스펙트럼이다. 인간의 눈은 전자기파 중 무지개 색으로 표현되는 가시광선이라는 극히 일부만을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감마선, X선, 자외선, 적외선, 전파 등의 광대한 세계는 인지하지 못한다. 이 한계는 우리의 인식을 왜곡한다.
허블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창조의 기둥’을 생각해 보자. 가시광선으로 본 모습은 거대한 가스와 먼지구름이 장막처럼 내부를 가리고 있어 신비롭지만 불투명하다.
하지만 같은 대상을 적외선 망원경으로 관찰하면, 먼지 장막은 투명하게 걷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아기별들이 탄생하는 경이로운 장면이 드러난다.
같은 천체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실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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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허블 우주 망원경이 찍은 모습(좌측)과 최근 제임스 웹이 촬영한 창조의 기둥=NASA/ESA/CSA/STScI/Hubble Heritage Project/Joseph DePasquale/Anton M. Koekemoer/Alyssa Pagan) 출처 이정현 미디어연구소 jh7253@zdnet.co.kr
우리의 눈은 지구환경에 최적화되도록 진화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인식 확장의 가장 큰 장애물, 즉 감각의 생물학적 한계이다.
이 타고난 동굴을 탈출하려는 인류의 위대한 시도가 바로 망원경이었다.
망원경은 인간이 우주에 적응하도록 감각을 확대 설계한 ‘인공 감각기관’이다.
이 새로운 눈을 통해 인류는 감각의 동굴을 부수고, '보는 것’과 ‘아는 것’이 서로를 발전시키는 위대한 선순환의 여정을 시작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안경사 한스 리퍼세이는 우연히 렌즈 두 개를 겹쳐보다 멀리 있는 교회 첨탑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렇게 굴절망원경은 탄생했다.
1609년, 이탈리아의 수학 교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직접 렌즈를 갈고닦아 30 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 렌즈를 밤하늘로 향했다.
갈릴레오는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으며, 그 글자는 삼각형, 원 등 기하학적인 도형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망원경은 바로 그 자연의 책을 읽는 새로운 '눈'이었다.
그가 본 달의 울퉁불퉁한 분화구와 목성 주위를 맴도는 4개의 위성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강력한 생명을 불어넣는 위대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견에 대한 당대 학자들과 성직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자신들이 수천 년간 진리라 믿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완벽한 우주관, 즉 ‘기존의 아는 것’이 망원경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이 대립을 통해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 즉 경험적 관찰과 실증적 증거가 텍스트의 권위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싹트게 된 것이다.
‘보는 행위’는 더 이상 '기존의 믿음'을 확인하는 수동적 절차가 아니라, 새로운 '앎'을 창조하기 위한 능동적인 지적 활동이 되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곧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렌즈를 사용하는 굴절망원경은 빛이 렌즈를 통과할 때 무지개처럼 번지는 ‘색수차’ 현상 때문에 상이 흐릿해지는 약점이 있었다.
이에, 아이작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빛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는 백색광이 여러 색의 빛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렌즈를 통과할 때 빛이 굴절되는 현상 자체가 상(相)이 흐릿해지는 ‘색수차’의 원인임을 규명했다.
그는 이 깊은 광학적 ‘앎’을 바탕으로, 1668년 빛을 굴절시키는 렌즈 대신 색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반사하는 거울을 사용하는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만들었다.
색 번짐 없이 훨씬 선명한 상을 얻을 수 있는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아는 것(광학 지식)’이 ‘보는 기술(망원경)’의 근본적인 혁신을 이끈 것이다.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 남매는 이 뉴턴의 반사 망원경을 이용해 우주를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그들은 이전처럼 특정 천체만 관찰하는 것을 넘어, 하늘 전체를 체계적으로 훑어 목록을 만드는 ‘스카이 서베이(Sky Survey)’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다.
이 강력한 눈과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허셜 남매는 1781년 태양계의 7번째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하여 인류가 알던 우주의 경계를 넓혔다.
나아가 방대한 관측을 통해 우리 은하가 거대한 원반 모양이며 태양계는 그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추정하며, 인류 최초로 우주의 거대한 구조를 그리기 시작했다.
뉴턴의 ‘앎’이 낳은 반사망원경이라는 새로운 ‘눈’은, 허셜의 새로운 ‘관측법’과 만나 우주를 개별 천체의 집합이 아닌, 거대한 ‘구조’로 파악하는 새로운 ‘봄’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20세기 초, 천문학계는 마치 가스 구름처럼 떠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 내부에 속하는지 여부를 놓고 ‘거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가스 구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먼 거리를 잴 방법이 없었다.
‘아는 것’의 진보를 위해서는 ‘보는 것’의 비약적인 발전이 절실했던 상황이다.
이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1917년 미국 캘리포니아 윌슨 산 천문대에 주 거울의 직경이 100인치(2.5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눈, 후커 망원경이 설치되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00inchHooker.jpg 출처 위키백과
거대한 구경은 단순히 상을 크게 보는 것을 넘어, 더 멀고 어두운 천체에서 오는 희미한 빛까지 모을 수 있는 ‘집광력’을 극대화했다. 이는 우주의 더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이 거인의 눈으로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그는 안드로메다 성운 속에서 주기적으로 밝기가 변하는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했다. 이 별의 밝기 변화 주기를 알면 실제 밝기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계산한 안드로메다까지의 거리는 우리 은하의 크기를 훨씬 넘어서는 거리였다.
이로써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와는 별개의 외부 은하임이 증명되었고, 인류가 아는 우주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또, 허블은 대부분의 은하에서 오는 빛이 붉은색 쪽으로 치우치는 '적색 편이(redshift)'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는 '도플러 효과'에 따라 은하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아가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는 ‘거리-속도 관계’, 즉 ‘허블의 법칙’을 확립했다. 이는 우주가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로써,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졌다.
이는 우주가 한 점에서 폭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의 결정적인 관측 증거가 되었다.
후커 망원경이라는 거대한 눈으로 본 우주는, 인류가 상상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보는 만큼 안다’는 명제가 가장 극명하게 증명된 순간이었다.
지상의 망원경은 지구 대기의 흔들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1990년, 인류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우주왕복선에 실어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
대기의 방해를 받지 않는 허블은 비교할 수 없는 선명함으로 별이 탄생하는 ‘창조의 기둥’이나 수십억 광년 떨어진 은하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특히, 하늘의 텅 빈 한 점을 열흘간 응시하여 3,000개가 넘는 은하를 찾아낸 ‘허블 딥 필드’ 이미지는, 우리가 보는 만큼만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또한, 인류의 시야는 이제 눈에 보이는 빛, 즉 가시광선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우주는 가시광선 외에도 다양한 파장의 빛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주 먼지에 가려진 곳을 보기 위해 적외선 망원경을, 우주 탄생의 메아리를 듣기 위해 전파망원경을 사용한다. 블랙홀이나 초신성 폭발 같은 격렬한 현상은 자외선, X선, 감마선 망원경으로만 포착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눈들은 마치 한 사람의 겉모습(가시광선)뿐만 아니라, 체온(적외선)과 뼈의 구조(X선)까지 보는 것과 같은 인식의 확장이었다.
‘보는 방식’이 다각화되자, 우주에 대한 ‘지식’ 역시 다차원적으로 깊어졌다.
그리고 2021년, ‘아는 것’이 ‘보는 법’을 설계한 최고의 사례인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여정을 시작했다.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태초에 출발한 빛은 우리에게 도달할 때쯤에는 파장이 긴 적외선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앎’을 바탕으로, 그것을 보기 위해 제임스 웹은 거대한 적외선 눈을 탑재했다.
그 목표는, 빅뱅 직후 탄생한 ‘최초의 별’과 ‘최초의 은하’를 직접 ‘보려는 것’이다.
허블의 발견이 낳은 '빅뱅 이론'이라는 ‘앎’이, “그렇다면 태초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낳았다.
인류는 이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간의 새벽을 정조준하는 새로운 ‘보는 기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2015년, 망원경의 역사는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중력파 망원경의 관측 성공이다.
이 망원경은 렌즈나 거울로 빛을 모으는 대신, 수 km에 달하는 진공 터널 속 거울 사이의 미세한 거리 변화를 레이저로 측정한다.
이것은 블랙홀 충돌 등 거대한 우주적 사건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출렁임’, 즉 중력파를 직접 감지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보는’ 행위가 아니다. 시공간의 진동을 직접 ‘느끼고 듣는’ 새로운 감각의 탄생이다.
갈릴레오가 렌즈로 하늘을 본 지 400여 년, 인류의 눈은 이제 빛의 한계마저 넘어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울림을 듣는 경지에 이르렀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모든 기술은 우리 자신의 확장이다"라고 말했다.
바퀴는 발의 확장이고, 망치는 주먹의 확장이며,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다. 그리고, 망원경과 현미경은 눈의 확장이다.
인류는 망원경을 통해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간의 속박을 넘어 우주의 기원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의 독재를 끝내고 새로운 감각으로 우주를 느끼기 시작했다.
확장된 시각은 필연적으로 확장된 세계관을 낳았고, 이는 과학을 넘어 철학, 종교, 예술 등 인간 정신의 모든 영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돌멩이를 쥐고 도구를 만들었던 호모 하빌리스의 후예이며, 이제는 거대한 망원경을 만들어 스스로를 우주적 존재로 확장하는 ‘호모 옵세르반스(Homo Observans, 관찰하는 인간)’가 되었다.
달팽이가 몸을 쭉 빼서 사방을 둘러보듯, 우리도 자기가 파놓은 동굴에서 목을 길게 뽑아 확장된 감각으로 세상을 한번 둘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