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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과 코페르니쿠스

지동설과 돈오

by 김대군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돈오점수 (頓悟漸修)’라는 틀로 설명했다.


이는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찾아오지만, 그 깨달음을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체화하는 것은 점진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깊은 통찰이 담긴 수행론이다.


돈오(頓悟)는 자신의 참모습(眞我)과 세상의 진리를 어둠 속 섬광처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단박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는 오랜 시간 헤매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 ‘동쪽’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방향을 알았다고 해서 즉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방향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나 혼란은 사라진 상태다.


점수(漸修)는 그 깨달음의 내용과 실제 삶이 완전히 일치 (悟行一致)하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이다.


동쪽이라는 방향을 알았으니, 이제 그 방향으로 묵묵히 걸어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낡은 습관과 편견을 닦아내고, 깨달음의 빛이 삶의 모든 영역을 비출 수 있도록 하는 점진적인 수행의 길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구가 돈다’는 혁명적 발상은 인류의 집단 지성이 체험한 ‘돈오’였다.


이후 150년간 이어진 험난하고 치열했던 증명의 과정은 그 위대한 깨달음을 완성해 가는 ‘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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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

By 미상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2,10430000,36,퍼블릭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8777740 출처 위키백과




코페르니쿠스의 섬광 같은 깨달음


깨달음의 가치는 그것이 깨뜨리는 무지의 장벽이 얼마나 견고한가에 따라 더욱 빛난다.


코페르니쿠스가 마주한 천동설은 단순한 과학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뼈대로 삼고, 기독교 신학을 통해 신성(神性)을 부여받은 거대한 요새와 같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달을 경계로, 그 위는 신의 영역인 영원불변의 천상계, 그 아래는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불완전한 지상계라고 보았다.


가장 무거운 흙으로 이루어진 지구는 당연하게도 우주의 가장 낮은 곳, 즉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세계관은 2세기경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정교한 수학 모델로 완성되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멈춰 있고, 달과 태양,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체계화했다.


이후 천동설은 서양 세계를 1400년간 지배하는 표준 우주 모델이 되었다.


그러다가, 1543년,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조용한 혁명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인위적인 장치를 사용하는 복잡함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다.


신이 만든 우주가 이토록 부조리하고 누더기 같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문제의 핵심이 ‘지구가 중심’이라는 잘못된 전제 자체에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아닌 태양을 놓게 되자 놀랍게도 행성들의 역행 운동과 같은 까다로운 문제들이 너무나 단순하고 조화롭게 설명되었다.


이것은 복잡한 현상 너머의 단순한 원리를 단박에 꿰뚫어 본, 인류 지성의 ‘돈오’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체의 운동은 신의 창조물이므로 당연히 완벽한 일 것이다’라는 시대적 편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의 모델은 실제 하늘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해내지 못하는 여러 결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마치 어두운 방 전체를 환히 비추기에는 부족하지만, 방의 구조가 어떠한지를 처음으로 언뜻 보여준 한 줄기 섬광과 같았다.


하지만 그 섬광을 본 사람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가 '동쪽'을 가리키자, 동쪽으로 가기 위한 위대한 ‘점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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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우주모델에서 천체들의 배치. 아직 원 궤도를 사용하고 있다.

By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 www.bj.uj.edu.pl,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88732 출처 위키백과




깨달음을 증명하는 위대한 여정


코페르니쿠스가 던진 깨달음의 씨앗을 바탕으로, 이후 세대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끈질긴 ‘점수’의 과정을 거쳐, 희미했던 깨달음의 빛을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으로 만들었다.


정직한 관찰자, 튀코 브라헤


덴마크의 귀족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는 점수의 가장 기본이 되는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관측가였다.


아직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그는 놀라울 정도로 좋은 시력과 직접 설계한 정밀한 관측 기기만으로 평생에 걸쳐 밤하늘을 기록했다.


그의 데이터는 이전의 그 어떤 기록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정밀했다.


그는 1572년 밤하늘에 나타난 초신성을 관측하여 ‘완벽하고 불변해야 할’ 천상계에도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었고,


혜성이 행성들의 궤도를 가로지른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하늘이 딱딱한 ‘수정 구슬’로 막혀 있다는 믿음을 깨뜨렸다.


그는 1,000여 개의 별에 대한 정밀한 위치와 등급을 기록한 항성 목록과, 수십 권 분량의 행성들에 대한 관측 일지를 작성했다.


튀코의 방대한 자료는 그 자체로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다음 세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가장 정직하고 성실하게 준비된 ‘화두(話頭)’였다.


고행으로 법칙을 찾은 요하네스 케플러


수학적 재능을 겸비한 요하네스 케플러는 스승인 코페르니쿠스의 ‘돈오’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 다른 스승인 튀코에게서 물려받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동설이라는 깨달음을 완벽한 수학의 언어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계산을 반복하는, 고행과도 같은 ‘점수’의 과정을 거쳤다.


그는 화성의 움직임이 원궤도라고 가정하고 계산할 때마다 스승 튀코의 관측 값과 미세한 오차가 발생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수년간의 처절한 계산 끝에 그는 마침내 2천 년간 이어져 온 행성의 ‘원운동’이라는 거역하기 어려운 도그마를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는 행성들이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며, 그 운동이 아름다운 세 개의 법칙(케플러의 행성 3법칙)으로 기술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불완전했던 깨달음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성취였다.


희미했던 깨달음의 윤곽이 비로소 명확한 법칙의 언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에 증거를 보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가 깨달음의 내적 논리를 완성했다면, 갈릴레오는 그 깨달음을 만인이 볼 수 있는 현실 세계로 끌어낸 위대한 실행가였다.


그가 직접 만든 망원경을 통해 본 밤하늘은 낡은 우주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증거들로 가득했다.


그는 달의 표면이 매끄러운 구가 아니라 지구처럼 산과 계곡이 있는 울퉁불퉁한 땅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목성 주위를 맴도는 4개의 위성을 발견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금성의 위상 변화였다. 그는 금성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을 관측했고, 이는 금성이 지구 주위가 아닌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을 때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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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갈릴레오에 의해 관측된 금성의 위상. 금성이 달처럼 모양이 변하고 있다.
By Nichalp 09:56, 11 June 2006 (UTC) - Based on PD raster image Image:Phasesofvenus.jpg, http://history.nasa.gov/SP-424/p4.jpg,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857453 출처 위키백과



갈릴레오의 발견들은 지동설을 더 이상 복잡한 수학적 가설이 아닌,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로 만들었다.


그의 ‘점수’는 진리를 실험실과 서재에서 해방시켜 대중의 인식 속으로 옮겨놓는 투쟁의 과정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목숨의 위협을 받아가며 낡은 장벽의 수호자들과 가장 격렬하게 충돌해야 했다.


종교 재판정에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읊조렸다는 그의 일화는, 어떤 억압도 내면의 깨달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수행자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아이작 뉴턴, 깨달음을 완성하다


케플러가 행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밝혔다면, 뉴턴은 ‘’ 그렇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제시했다.


그는 사과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돌게 하는 힘, 그리고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게 하는 힘이 모두 동일한 원리, 즉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 때문임을 밝혔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완벽하게 수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이것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구분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적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린, 우주관에 대한 깨달음의 최종적 완성이었다.


지동설은 더 이상 여러 가설 중 하나가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원리의 필연적 귀결이 되었다.


150년에 걸친 위대한 ‘점수’의 여정은 마침내 지동설이라는 깨달음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한 진리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 깨달음은 한번 눈을 뜬 뒤에는 결코 이전의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류의 첫 번째 ‘불가역적’ 각성이었다.



우리 시대의 돈오와 점수


보조국사 지눌은 돈오와 점수를,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열기를 얻어서 녹아야 비로소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파했다.


'얼음'은 우리가 오랫동안 쌓아온 습기(習氣), 즉 낡은 습관, 무의식적인 분노, 탐욕, 번뇌 등을 말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지나친 대립, 커져가는 빈부격차, 뿌리 깊은 지역감정 등이 지눌이 말한 '얼음'이라는 것을 깨닫은 지 오래다.


이제 이 차디찬 얼음들을 녹이고 풀어내어 사회 모든 곳에 골고루 흐르도록, 우리 모두의 진심 어린 점수의 과정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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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