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사랑은 청색편이 인가 적색편이 인가

도플러 효과

by 김대군


다가감과 멀어짐


지구에 홀로 떨어진 생텍쥐페리의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왕자는 외로움을 느끼고 여우에게 "나랑 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여우는 아직은 놀 수 없다며 말한다.


"나에게 너는 아직 다른 수많은 소년과 똑같은, 조그만 소년에 지나지 않아. 너에게 나도 다른 수많은 여우와 똑같은 여우일 뿐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필요한 존재가 될 거야... “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 나는 너를 곁눈질로 힐끗힐끗 볼 테고, … 그러다가 날마다 너는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면 돼..."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아.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언제 내 마음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잖아..."


어린 왕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매일 여우에게 다가가 그를 길들였고, 마침내 어린 왕자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자, 여우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말한다.


어린 왕자는 "네가 길들여달라고 했잖아.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네."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러자 여우는 "아니야, 얻은 게 있어. 저 밀밭 빛깔 말이야."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지. 밀밭을 봐도 내게 떠오르는 게 없어.


하지만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잖아. 그래서 황금빛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럼 나는 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야..."


이 일화는, ‘다가감’이 무의미한 세상을 ‘의미 있는’ 세상으로 바꾸는 창조의 과정임을 보여 주고 있다.



the-little-prince-5235474_1280.jpg




프랑스의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는 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어 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원색의 점들을 캔버스 위에 촘촘히 병치(竝置)하는 '점묘화(Pointillism)' 기법을 사용했다.


쇠라는 이렇게 찍힌 점들이 관람자의 눈 속에서 스스로 섞여 더 밝고 선명한 빛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었다.


그의 대표작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앞에 가까이 다가서면, 인물의 형태는 해체되고, 풀밭의 색은 노랑, 파랑, 초록의 의미 없는 점들로 분열된다.


하지만, 그림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면, 무의미했던 수많은 점들은 우리의 눈 속에서 비로소 서로 섞이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혼란스럽던 원색의 파편들은 '시각적 혼합'을 통해 풍부한 색채와 찬란한 빛으로 살아나고, 마침내 화창한 오후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풍경이 떠오른다.


쇠라의 그림이 멀어짐으로써 의미를 되찾듯, 삶의 진정한 의미와 형태 역시 ‘거리’와 '시간'의 '멀어짐'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Georges_Seurat_-_Un_dimanche_après-midi_à_l'Île_de_la_Grande_Jatte.jpg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4년-1886년, 시카고 미술관, 각각의 사회 계급의 구성원들이 공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쇠라가 약 3m 너비인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2년이 걸렸다.

By 조르주 쇠라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2940 출처 위키백과




트럼펫 연주단


1842년, 도플러는 당시 천문학계의 수수께끼였던 '쌍성(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두 개의 별)의 색깔이 왜 변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혹시 별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움직임 때문에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는 별이 지구로 다가올 때는 빛의 파장이 압축되어 푸른색으로 보이고(청색편이), 멀어질 때는 파장이 늘어나 붉은색으로 보일 것(적색편이)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당시 기술로는 별빛의 미세한 색 변화를 증명할 수 없었지만, 이 아이디어는 훗날 우주의 비밀을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도플러의 이론은 "검증되지 않은 상상"이라며 무시당했다.



이때 네덜란드의 기상학자 크리스토퍼 보이스 발롯이 별빛으로 증명하기 어렵다면, 소리로 먼저 증명해 보자고 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철로 위를 달리는 개방형 기차에 트럼펫 연주단을 태우고, 일정한 음높이의 소리를 계속 내게 한다.


그리고 기차역 플랫폼에는 절대음감을 가진 다른 음악가들을 세워, 기차가 다가올 때와 멀어질 때 들리는 소리의 음높이 변화를 기록하게 했다.


그 결과, 플랫폼의 음악가들은 기차가 다가올 때는 트럼펫 소리가 분명히 더 높게 들리고, 멀어질 때는 더 낮게 들린다고 정확히 기록했다.


이 기발한 실험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플러 효과를 증명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차에서 트럼펫을 연주한 사람에게는 시종일관 같은 음높이였으나, 플랫폼에서 듣는 사람들에게는 열차의 오고 감에 따라 소리가 변한다는 점이다.


즉, 구급차 운전사는 사이렌 소리가 일정하나, 외부에서는 다르게 들리는 것과 같은 원리다.



도플러 효과는, 빛과 소리가 다가오거나 멀어질 때 빛의 색깔 변화 및 소리의 높낮이 변화에 대한 발견이다.


즉, 빛은 다가오면 파장이 짧아져서 청색(청색편이, 靑色偏移)으로,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져서 적색(적색편이, 赤色偏移)으로 보인다.


소리는 다가오면 파장이 짧아져서 고주파의 고음으로,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져서 저주파의 저음으로 들리게 된다.



image.png?type=w580




사랑의 청색편이와 적색편이


2010년 개봉된 영화 <500일의 썸머>는 주인공 톰이 썸머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500일간의 톰의 감정 변화를 보여준다.


톰이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썸머와 음악 취향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썸머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확신한다.


이때부터 톰의 마음이 썸머를 향해 맹렬히 '다가가기' 시작하고, 썸머에게서 나오는 모든 신호를 '고주파'(청색편이)로 증폭시켜 보듬는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매력", "목에 있는 하트 모양의 점"은 “우주가 그녀를 나에게 보내기 위해 표식으로 심어준 운명의 계시”, "삐딱한 미소"는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미화된다.


그러다, 400여 일이 지나 썸머가 톰에게 이별을 고한 후, 그동안 매혹적인 고주파로 들렸던 그녀의 모든 신호가 이제는 견딜 수 없는 '저주파의 소음'(적색편이)으로 바뀌게 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게을러빠진 머리", "목의 하트 모양 점"은 "보기 흉한 멍 자국", "삐딱한 미소"는 "늘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으로 치부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에 빠져, 나의 모든 감각과 기대가 그를 향해 다가갈 때, 그의 모든 것은 실제보다 더 강렬하고 아름답게 인식되는 ‘마음의 청색편이’가 일어난다.


이때 씐 ‘콩깍지’는 강력한 ‘주파수 증폭기’와 같다.


그의 고유한 인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향한 나의 열망이라는 ‘다가가는 속도’가 내 마음속에 ‘완벽한 사람’이라는 환상의 ‘고주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 럿거스 대학교의 헬렌 피셔(Helen Fisher) 교수 등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의 평균 지속 기간은 약 12개월에서 18개월이라고 한다.


사랑이 식으면 심리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의 모든 것은 힘을 잃고 희미해지는 ‘마음의 적색편이’를 겪게 된다.


청색편이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단점들이 길게 늘어진 파장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때 지혜롭게 들렸던 그의 말은 이제 공허한 잔소리로 들리고, 매력적이었던 습관은 신경을 거스르는 악습으로 변한다.




일체유심조


1400여 년 전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대사가 어느 날 밤 토굴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었다가, 아침에 구더기가 꿈틀대는 해골에 괸 썩은 빗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고 모두 토해냈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깨달음이 그를 강타했다.


“어젯밤에는 그토록 감미롭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이토록 역겹게 느껴지는구나. 물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


달고 쓰다는 분별, 깨끗하고 더럽다는 생각은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一切唯心造),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렇다.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객관적 ‘사물’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과 갈증 속에서 물에 ‘다가간’ 원효의 마음은 그것을 ‘감로수’라는 고주파의 청색편이로 만들었다.


반면,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후 물에서 ‘멀어진’ 그의 마음은 똑같은 물을 ‘썩은 구정물’이라는 저주파의 적색편이로 바꿔놓았다.


물의 본질은 중립적이었으나, 마음의 움직임이 ‘달콤함’과 ‘역겨움’이라는 극적인 ‘편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 부자 아빠가 아들에게 '가난'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가난한 시골 농부의 집으로 여행을 떠나 며칠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여행은 어땠니? 이제 우리가 얼마나 부유하고 저들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겠느냐?"


아들이 "정말 고마워요, 아빠.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처음 알았어요."


아빠가 어리둥절하자 아들이 "우리는 개가 한 마리뿐인데, 저들은 네 마리나 있었어요." "우리는 정원 한가운데 수영장이 있지만, 저들에게는 끝없이 흐르는 강이 있었어요." "우리는 수입한 등불로 정원을 밝히지만, 저들에게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 있었어요." "우리는 높은 담장을 쌓고 살지만, 저들에게는 그들을 지켜주는 이웃들이 있었어요."


아빠는 '소유'라는 관점으로 시골에 '다가갔다'. 반면 아들은 '경험'과 '관계'라는 열린 마음으로 그곳에 '다가갔다'.


똑같은 풍경을 보았지만, '다가가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한 명은 '결핍'을, 다른 한 명은 '풍요'를 본 것이다.


일체유심조다.



우리는 파동의 수신자이기에 앞서 발신자다.


나의 삶 자체가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는 하나의 파동인 것이다.


이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나의 ‘편이’는 무엇인가?


나는 세상에 어떤 주파수의 소리를, 어떤 색의 파동을 내보내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harvest-4896291_1280.jpg



keyword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