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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창조

빅뱅

by 김대군

시작, 부동의 동자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아마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변화에는 반드시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의자가 밀리는 것은 손이 밀었기 때문이고, 그 손을 움직인 것은 근육의 수축이며, 그 근육은 뇌의 명령을 받았다. 이처럼 인과의 사슬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슬이 무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원인의 사슬에 끝이 없다면, 애초에 첫 번째 움직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과관계의 맨 처음에는 반드시 최초의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 Unmoved Mover)’다.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제1 원인이지만,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는 존재이다.


즉, 이 ‘부동의 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북극성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별들의 운행 기준이 되듯, 모든 것의 궁극적인 시작이다.


한편, 노자는 『도덕경』에서 “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라고 했다.


노자의 시작은 이름 붙일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저절로 그러한 ‘(道)’이다.


이 도에서, 만물이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기운인 ‘하나(一)’가 생겨나고, 이 하나는 다시 세상의 기본 원리인 음(陰)과 양(陽)이라는 ‘둘(二)’로 나뉜다.


이 대립적인 두 기운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조화를 이룬 ‘셋(三)’을 거쳐,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세상 ‘만물(萬物)’이 태어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작


이집트 신화: 창조의 신 아툼


태초에 세상은 형태가 없고 끝없이 펼쳐진 혼돈의 물, '누(Nu)'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이 원초의 물에서 창조신 아툼(Atum)이 스스로의 힘으로 언덕 위로 솟아났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아툼은 자신의 그림자와 결합하거나 스스로 생식 행위를 하여 공기의 신 슈(Shu)와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Tefnut)를 낳았다.


이들이 다시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누트(Nut)를 낳았고, 이 들로부터 다시 여러 신들이 태어났다.


Nun_Raises_the_Sun.jpg

'누'가 창조의 물에서 갓 태어난 태양(아툼)을 실은 태양의 돛단배를 들어 올린다.

By Original author unknown - Scanned from The Complete Gods and Goddesses of Ancient Egypt by Richard H. Wilkinson, p. 117; artwork from the Book of the Dead of Anhai,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7699180 출처 위키백과



중국 신화: 반고 설화


하늘과 땅이 분리되지 않은 채, 마치 거대한 달걀처럼 생긴 혼돈 속에서 거인 반고(盤古)가 태어났다.


1만 8천 년간 잠을 자던 반고는 깨어나자마자 거대한 도끼로 혼돈을 내리쳐 하늘과 땅을 분리했다.


그는 하늘이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두 팔로 하늘을 떠받치고 서서, 하늘과 땅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기력이 다해 쓰러져 죽자, 그의 몸은 세계 만물이 되었다.


숨결은 바람과 구름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 왼쪽 눈은 해, 오른쪽 눈은 달, 몸은 산맥, 피는 강물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 영웅신 마르둑


바빌로니아의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에 따르면, 태초에는 민물의 신 '압수'와 소금물의 신이자 혼돈을 상징하는 티아마트(Tiamat)만이 존재했다.


그 후, 여러 신들이 태어나, 이 들 간의 갈등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모든 신들이 혼돈의 여신 티아마트 앞에서 공포에 떨 때, 영웅신 마르둑(Marduk)이 나서서 그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마르둑은 마침내 티아마트를 죽이고, 그 거대한 시체를 둘로 나누어 한쪽으로는 하늘을, 다른 쪽으로는 땅을 만들었다. 눈에서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나오게 했다.



창세기: 말씀으로 창조된 질서 정연한 세계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만이 있었다.


신은 이 무질서의 상태에 말씀(Logos)으로 개입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을 창조하고, 빛과 어둠을 ‘나누어’ 낮과 밤이라 칭했다.


신은 엿새 동안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뭍과 바다를 나누고, 식물, 천체, 동물을 종류대로 창조하며 질서 정연한 세계를 만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창조했다.



과학이 설명하는 시작


과학이 들려주는 우주의 시작 이야기는 ‘빅뱅 이론’이다.


관측 결과,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르게 멀어진다 (허블-르메트르 법칙).


이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모든 것이 한 점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이론은 약 138억 년 전, 아주 뜨겁고 작은 한 점에서 우주가 시작되어 팽창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빅뱅 직후 1초도 안 되는 순간, 우주는 ‘급팽창’을 통해 거대하게 커졌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탄생했다.


이후 약 38만 년 사이에 수소와 헬륨이 만들어졌고, 마침내 태초의 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CMB)’가 바로 이 태초의 빛이다.


WMAP_2012.png

관측 가능한 우주의 모든 공간에 분포해 있는 우주 배경 복사(宇宙背景輻射)

By NASA / WMAP Science Team - http://map.gsfc.nasa.gov/media/121238/ilc_9yr_moll4096.png,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285693 출처 위키 백과



수억 년이 지나자 물질이 중력에 의해 서로 뭉쳐져 마침내 최초의 과 은하가 탄생했다.


이후 별들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며 탄소, 산소, 질소, 철 등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졌고, 오늘날의 다채로운 우주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빅뱅 이론은 우주의 기원과 진화를 설명하지만, 모든 것이 응축된 ‘특이점’ 자체나 빅뱅 이전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답하지 못한다.


이 질문은 현대 과학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남상, 화학적 변화, 창조


어느 날 공자가 양쯔강(揚子江)을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토록 거대한 강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술잔(觴) 하나 겨우 띄울(濫) 정도의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공자는 모든 위대한 것들의 시작은 본래 미미하다는 것을 ‘남상(濫觴)’이라는 단어 속에 압축시켰다.


우주가 작은 특이점에서 출발하였듯 세상의 모든 창조, 그것이 우주적이든 인간적이든, 그 기원은 작고 소박한 첫걸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걸음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화학적 변화’라는 창조의 가장 근원적인 문법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마법이 아니라, 있는 것들의 재배열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빅뱅 핵합성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해 헬륨을 ‘창조’한 우주 최초의 화학반응이다. 별의 내부는 더 무거운 원소들을 창조하는 거대한 화학 공장이다.


지구에서 무기물 분자들이 결합하여 아미노산을, 아미노산이 결합하여 단백질을 이루며 생명을 ‘창조’했다.


또,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만나 생명의 근원인 (H₂O)을 창조한다.


그리고, 인류는 흙에 불을 가해 토기를, 밀가루와 물, 효모를 구워 빵을 ‘창조’해낸다.


19세기 초, 천연고무는 온도에 매우 취약했다. 여름에는 엿가락처럼 녹아내렸고, 겨울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거의 쓸모가 없었다.


1839년 어느 날, 발명가 찰스 굿이어는 실수로 고무와 유황 혼합물을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뜨렸다. 고무는 타버리는 대신, 가죽처럼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새로운 물질로 변했다.


이 우연한 '화학적 변화'를 통해 열과 추위에 강한 가황(加黃) 고무가 탄생했다. 이는 타이어, 신발 등 현대 산업의 필수 소재가 된다.


여러 창조 신화가 그렇듯 창조는 ‘혼돈’ 속에서 시작된다.


다양한 경험, 지식, 감정, 스쳐 지나간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면의 자산이 바로 창조의 원재료다.


이 혼돈에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의지’를 부여하고, 여러 요소들을 용기 있게 결합하는 ‘화학 실험’을 해본다.


혼돈의 시간을 견디며 문제에 계속 집중할 때, 어느 순간 파편화된 아이디어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독일의 심리학자 칼 뷜러가 명명한 바로 그 ‘아하! 모멘트(Aha! Moment)’가 찾아온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서 작은 빅뱅이 일어나는 창조의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138억 년 전 장엄한 빅뱅의 후예들이며, 우주를 탄생시킨 그 창조의 문법은 우리 내면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혼돈을 끌어안고, 용기 있게 결합하고 실험할 때,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매일 새로운 우주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위대한 여정의 시작은 언제나 ‘남상’, 술잔 하나 띄울 만한 작은 첫걸음에서부터 일 것이다.


마음속의 부동의 동자로 하여금 위대한 시작을 알리는 작은 술잔을 띄우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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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