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홀과 광속 돌파
중국 고전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장(武將) ‘여포’는 당대 최강의 액션스타이다.
일대일 대결은 물론이고, 유비 삼 형제가 함께 덤벼도 당해낼 수 없었다. 그 앞에서는 모든 영웅이 평범한 장수로 전락했다.
그런데, 그 힘을 자기 방안에서만 쓸 줄 알 뿐, 밖에서는 영 형편없는 사람을 우리는 ‘방구석 여포’라고 부른다.
빛은 초속 약 300,000 km로 날아간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고, 달까지도 1.2초면 도달한다.
그리고, 현대과학이 아는 한 빛보다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구에서 화성에 있는 탐사 로버(큐리오시티, 퍼서비어런스 등)에 명령을 내리면 전파가 화성까지 가는 데 평균 약 13분이 걸린다.
전파는 빛의 일종이기 때문에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따라서 명령을 보내고 로버가 그 명령을 수행한 뒤 "수행 완료" 신호를 다시 지구로 보내기까지는 왕복 최소 26분 이상 소요된다.
NASA는 실시간 조종이 아닌, 하루치 명령을 미리 프로그래밍하여 보내는 방식으로 로버를 운용한다.
태양계 안에서도 빛의 속도가 결코 빠르지 않다.
하물며,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까지 가는 데 빛의 속도로 4.2년이 걸린다. 바로 옆집에 가는데 4년이 넘게 걸린다.
우리 은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로지르는 데는 무려 10만 년이 소요된다. 이웃 은하인 안드로메다까지는 250만 년이라는, 인류의 역사를 모두 더해도 부족한 장구한 시간이다.
우주적 스케일에서 빛은 더 이상 번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혹은 태양계라는 좁은 ‘방구석’을 벗어나면 더 이상 여포가 아니다. 속 터지는 굼벵이다.
빛은 지구의 모든 생명을 싹 틔우지만, 동시에 그 절대적인 속도제한은 인류를 광활한 우주라는 투명한 감옥에 가두는 굴레가 된다.
과연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존재인지,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앞에서 우주가 서로 단절된 외로운 공간이라는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왜 신은 갈 수도 없는 우주를 이토록 광대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든다.
아인슈타인은 무거운 물체는 주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고 했다. 무거운 볼링공이 고무판을 움푹 파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공간이라는 고무판을 아예 '접어서' 지름길을 만들 수는 없을까? 이것이 바로 '웜홀'의 원리이다.
종이의 양쪽 끝에 있는 두 점을 잇는 가장 빠른 방법은 종이를 접어 두 점을 맞닿게 한 뒤 구멍을 뚫는 것이다.
웜홀은 이처럼 우주의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극적으로 단축하는 '시공간의 지름길'이다.
웜홀의 상상도
By Panzi - English Wikipedia,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45478 출처 위키백과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선은 결코 빛보다 빨리 움직이지 않지만, 가야 할 거리가 짧아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초광속 여행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영화 <인터스텔라>와 같은 공상과학 분야에서나 거론될 법한 이론이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웜홀의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물질과 반대로 서로를 밀어내는 척력(반중력)을 가진 ‘특이 물질(exotic matter)’이 필요하다고 보고, 오늘도 이를 찾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인류에게는 빛의 속도를 넘어서는 것이나, 웜홀을 만드는 것이나 모두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튀빙겐 대학의 물리 연구소 앞 광장과 프랑스 북부 불로뉴 쉬르 메르 근처의 모래 언덕을 연결하는 시뮬레이션된 통과 가능한 웜홀의 이미지.
By CorvinZahn - Gallery of Space Time Travel (self-made, panorama of the dunes: Philippe E. Hurbain), CC BY-SA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716557 출처 위키백과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왕은 수학자 유클리드에게 직접 기하학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증명과 공식을 따라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지루했다.
왕은 "기하학을 좀 더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는, 왕을 위한 특별한 길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폐하, 나라를 여행할 때는 왕께서 다니시는 왕도(王道)와 평민들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만,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즉, 학문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누구라도 꾸준히 노력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지름길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학의 왕'으로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0살 때의 일이다.
그의 선생님은 잠시 쉬고 싶은 마음에 학생들에게 "1부터 100까지 모든 숫자를 더하라"는 아주 귀찮은 문제를 내주었다.
아이들이 "1+2=3, 3+3=6, 6+4=10..." 하며 끙끙대며 덧셈을 시작한 지 몇 초 만에, 가우스는 손을 들고 정답을 외쳤다.
"정답은 5050입니다!"
가우스는 숫자를 순서대로 더하는 대신, '지름길'을 찾아냈다.
1과 100을 더하면 101, 2와 99를 더해도 101, 3과 98을 더해도 101, ... 50과 51을 더해도 101
즉, '101'이라는 합계가 총 50쌍(100 ÷ 2)이 나온다는 것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101 × 50 = 5050이라는 계산을 해낸 것이다.
이 일화는 문제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것이 지름길임을 보여준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온에는 아주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있었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神託)이 전해져 내려왔고,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으나 아무도 풀지 못했다.
이곳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역시 매듭 풀기에 도전했다. 그는 한참 동안 매듭을 살피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때로는 기존의 규칙 자체를 의심하고 파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장 프랑수아 고드프로이의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1767)
By Jean François Godefroy - VladoubidoOo,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0277916 출처 위키백과
아인슈타인은 "가장 빠른 길은 익숙한 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새로운 길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 길을 가는 것이 결국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철역에서 내려 집까지 찾아가는 그 익숙한 길이 바로 지름길이다.
그렇다. 지름길 즉, 왕도는 있다.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크게 성공한다.
신은 이 세상에 인류가 문제 풀기를 통해 찾을 수 있는 진리라는 이름의 보물을 곳곳에 숨겨놓은 것 같다.
혹독한 추위라는 문제는 ‘불’이라는 보물을 찾게 했고, 배고픔과 수렵의 불확실성은 ‘농업’ 시스템을 구축하게 했다.
질병은 ‘의학’과 ‘백신’을 만들어냈으며, 소통의 단절은 ‘문자’와 ‘인터넷’이라는 보물을 안겨주었다.
어릴 적 소풍날처럼 어떤 보물은 화단 위에 놓여 있어 찾기 쉬웠고, 어떤 것은 풀속 깊이 숨겨져 있어 찾기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뉴턴의 ‘만유인력’이나 이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꽤 찾기 어려웠던 보물이었다.
이처럼 인류의 문제 풀기는 기존의 한계를 돌파하고 문명의 지평을 한 뼘씩 넓혀온 위대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풀지 못한, 신이 가장 깊고 먼 곳에 숨겨둔 듯한 보물이 하나 있다. 바로 ‘광속 돌파’라는 이름의 보물이다.
인류는 지구의 중력이라는 거대한 속박을 이겨낸 경험이 있다.
‘지구 탈출 속도’인 11.2km/s를 초과함으로써, 우리는 중력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이겨내고 우주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갔다.
지구라는 2차원적 표면의 삶을 3차원의 우주로 확장시킨 위대한 도약이었다.
'뉴턴의 대포'라고도 불리는 뉴턴의 탈출 속도 분석사고 실험. A, B는 지구로 다시 떨어지고, C, D는 고정된 높이에서 궤도를 형성한다. E는 탈출 속도(11.2km/s)를 지닌 경우이다.
By user:Brian Brondel - 자작,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657849 출처 위키백과
우리가 마주한 광속의 한계는 어쩌면 지구의 중력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어쩌면 광속 돌파란, 3차원 공간이라는 ‘중력장’ 자체를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탈출 속도’와 같은 개념일 수 있다.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어 액체에서 기체로 그 형태를 바꾸듯, 광속은 우리에게 익숙한 3차원 시공간이 유지되는 마지막 임계점일 수 있다.
지구 탈출이 우리에게 우주를 선물했듯, 3차원의 탈출은 우리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우주, 즉 ‘연결된 우주’를 선물할지도 모른다.
뒤돌아 보면, 우리의 삶은 문제 풀기와 보물 찾기의 연속이다.
하나의 문제를 풀면 다음 단계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문제와 씨름하고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헤매는 위대한 탐험가들이다.
꽃말이 보물을 뜻하는 가자니아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