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스토너》, 김승욱 옮김, RHK, 2015
책장에서 누렇게 색이 바랜 채 늙어가는 소설 한 권을 이 막중한 시절에 펼쳐 들었다. TV를 켜면 뉴스를 아니 볼 수 없고,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두통이 일고 감정이 다운되니, 이럴 땐 활자 세계가 유일한 피난처다. 완독하고 보니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3)를 소설화하면 꼭 이런 톤일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한 남자가 문학의 세계에 눈을 뜬 뒤 일평생 그 세계를 연구하다 저무는 이야기, 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요약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
"출간 후 50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위대한 소설"이라는 카피가 전혀 과장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책, 이라고 우선 말해두고 싶다. 30여 년간 대학 강단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던 존 윌리엄스(1922. 8. 29. - 1994. 3. 4.)의 세 번째 장편소설 《스토너(Stoner)》(1965)는 저자 자신을 주인공으로 써내려간 논픽션이라 해도 믿을 만큼 핍진성 가득한 서술로 첫 장부터 흡인력이 상당하다.
그러나 내가 주목했던 건 사실적인 인물과 배경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물과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었다. 영문학자라서 그럴까, 대학 교정에 해가 떴다 지는 장면 하나를 묘사하는 데도 인물의 심리와 감정, 미래의 운명까지 암시하는 단어들을, 경제적으로, 탁월하게 배치한다. 얼핏 보면 심심한데 다시 읽어보면 놀라움을 멈출 수 없는 문장들의 연속이다. 이 소설은 내용과 주제를 뒷받침하는 문장과 단락, 장들의 배치가 상당히 침착하고 정교하다(지적 거리?). 아울러 수사적 표현들이 정제돼 있어 딱 맞춤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란하지 않으니 술술 읽힌다. 그런데 읽다 보면 깊다. 너무 깊다.
가령, 농투성이 아들로 농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온 자신으로 하여금 영문학에 눈을 뜨게 해준, 아니 자신이 그 세계를 연구해야만 하는 사람이자 교육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운명임을 깨닫게 해준 아처 슬론 교수를 만난 뒤 연구실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보자.
[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갑자기 슬론이 아주 멀게 보였다. 연구실의 벽들도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스토너는 자신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지." 슬론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니. 그는 자신이 슬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연구실을 나왔다. 입술이 근질거리고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는 잠든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지만, 주위의 것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복도의 광택이 나는 나무 벽들을 스치듯이 지나갈 때는 나무의 온기와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자기 발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만 같은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감탄했다. 홀에서는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학생들 각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구분되고, 그들의 얼굴이 친밀하면서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제시 홀에서 오전 풍경 속으로 나갔다. 이제는 캠퍼스가 그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이끌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pp. 31-32) ]
이제까지 메말랐던 잿빛 세상이 물기 촉촉한 총천연색 파노라마로 뒤바뀌는 경험,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결코 어제와 똑같을 수 없는 오늘, 이런 개안(開眼)과 각성(覺醒)의 순간을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만났다거나, 나의 본성을 깊이 깨달았다거나,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앎과 미에 감동했다거나 등,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살아 날뛰며 나의 시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을. 그런 지점들을 별 과장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그려나가는 저자의 필력이 감탄스럽다. (위 인용문은 일부의 일부일 뿐.)
첫눈에 반해 결혼했지만 히스테리 환자가 되어 부부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아내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다. 서술자인 스토너와 대상인 이디스를 둘 다 소외시키지 않는 서술법이랄까. 사실 이런 어법에는 저자 존 윌리엄스가 자신과 타자, 대상과 세계를 이해하고 마주하는 태도가 은연중에 밴 것이라고 본다(어느 한 리뷰는 그의 여성 편력을 꼬집기도 하지만. https://newcriterion.com/article/a-good-writer-is-hard-to-find/). 1965년에 발표된 남성 화자 중심 소설이 오늘날 페미니즘 시대에 다시 각광을 받는 이유일 수도. 태도가 곧 표현이요 필력이라는 듯, 딸 그레이스와 연인 캐서린에 대한 묘사는 말해 무엇하랴. 그녀들의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강력한 사랑을 느끼게 한다.
[ 이디스의 옷이 침대 옆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이불도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었다. 이디스는 주름 하나 없는 하얀 침대보 위에 알몸으로 누워 빛을 받고 있었다. 알몸으로 널브러진 그녀의 모습이 느슨하고 방탕하게 보였다. 게다가 연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윌리엄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p. 141) ]
한편,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기본과 원칙을 사수하는 스토너는 흔히 사교술 없는 완고한 인물로 받아들여지는데, 대학원의 문제아 찰스 워커를 싸고도는 (차기 학과장) 로맥스 교수와의 팽팽한 신경전, 그 둘을 중재하는 (오랜 친구이자 현 학과장) 핀치 교수와의 면담 장면들은 실제 학내 풍경을 보는 듯 리얼하다. 무엇보다 인물과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이 소설의 전체 주제라 할 만한 단어를 슬쩍 끼워넣어 전달하는 저자의 솜씨란!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
[ "고든. 데이브 매스터스가 옛날에 했던 말 기억하나?"
핀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썹을 치떴다. "갑자기 데이브 매스터스 얘기는 왜?"
스토너는 맞은편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그 친구가 뭐라고 했냐면……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뿐일세." (p. 235) ]
아내 이디스, 동료 교수 로맥스, 일부 학생들의 노골적인 무시와 소외로 한꺼번에 늙어버린 스토너가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던 날들은, 내 개인 취향이겠지만, 그저 울컥했다. 이런 묘사는 흉내 내기로는 불가능하다. 직접 느끼고 감각해야만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다.
[ 한번은 저녁강의를 마친 뒤 늦게 연구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낮에 눈이 내려서 바깥 풍경이 하얗고 부드럽게 보였다. 연구실 안은 지나치게 더웠다. 그는 사방이 막힌 연구실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책상 옆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며 하얗게 변한 캠퍼스를 눈으로 방황했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책상 위의 불을 끄고는 덮고 어두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雪)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pp. 252-253) ]
이후, 한 줌 남은 불씨처럼 꺼져들어가던 스토너의 삶에 돌연히 한 여자가 들어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세상이 어떻게 멈추는지, 그들의 세상이 어떻게 절대화되는지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백미라 할 만한 부분이니... 인용하지 않고 건너뛰겠다.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미지의 독자를 위해.
슬픔과 고독이 디폴트 값인 존재에게 어느 날 문학이, 우정이, 사랑이, 죽음이 찾아온다 - 삶의 절반쯤 다다랐을 때 이런 스토리에 끌리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모두가 읽어보기를 바라면서도, 귀한 이들에게만 은밀히 건네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