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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인간

한 문단을 사흘째 고치다 깨달은 것

2021년 5월 18일

by 김담유

- 첫 문장이 중요하다 : 어설프게 잡으면 글이 안 풀려서 여러 날 고생한다. 무식하게 몇 줄 보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쓰다 보면 글이 내게 말을 건다. 그만 써. 다시 써. 이건 아니라고 봐~ (드라마 <오케이 광자매> 아버지 말투)


- 정서적 감흥, 고양된 의식이 글쓰기의 엔진이다 : 감흥과 고양 등 몸과 맘이 약간 업된 상태로 돌입해야 글이 술술 풀린다. 평소와는 다른 결, 다른 틈새로 내 의식이 낚싯바늘처럼 빠져나가야 좀처럼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실타래처럼 끌려 나온다. 그런데 이 상태가 마냥 기다린다고 찾아오지는 않는다.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가 되돌아왔다가 포기했다가 그러는 와중에 어느 날 불쑥 시작된다. 그리고 대체로 짧다. 한나절, 또는 하루 고양되었다가 여러 날 가라앉는다. 흐미. 미쳐부러~


- 시와 산문은 완전히 다르다 : 산문은 확실히 논지, 논리가 명확해야 한다. 사적 에세이라도 서술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시는 오히려 낯선 것들끼리, 극단적인 것들끼리 부딪히고 충돌해야 에너지가 생기고 이미지가 만들어지는데 산문은 일종의 환유처럼 유사한 것들을 한 층 한 층 쌓아가면서 의미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무조건 체력이 필요하다(하루키와 김연수가 왜 달리는 몸을 만드는지 알겠음). 시는 죽음을 앞둔 폐병쟁이도 찰나에 담아낼 수 있지만(그럴수록 강력해지지만), 산문은 끈기와 인내, 지구력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력과 더불어 지력도 필수적이다. 생각을 밀어붙이고 끌고 나가면서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찾는 일은 상당한 지력을 요한다. 지력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 생각을 붙들고 늘어지는 힘에 좌우된다. 많이 써야 글이 는다는 말은 맞지만 어중간한 생각을 아무리 많이 반복해봤자 작품이라 할 만한 것을 완성하기는 어렵다. 사고가 아닌 사유가 필요한 이유.


-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 하루 묵혔다 고치고, 또 하루 묵혔다 고치면 확실히 글이 나아진다. 어제 문득 쓰인 문장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를 오늘 고치다 보면서 깨닫는 일이 부지기수다. 사실 글쓰기는 일종의 기다림 같다. 의미를 온전히 알고 문장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쓰다 보니 어떤 의미에 닿아 있고, 그 의미를 온전히 알아차리기도 전에 문장은 저만치 나를 앞서가 있다. 글은 내가 쓰지만, 운전대를 잡은 이는 내가 아니라 글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글쓰기에는 유한화가 필요하다, 일본의 철학자 지바 마사야 선생이 공부에는 유한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듯이. 그만 써야 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감각과 그만 멈출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 말할 수도 없고 다 말해지지도 않는다. 내일 다시 쓰더라도 오늘은 일단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 접속사는 힘이 세다 : 내가 자주 쓰는 접속사가 ‘하지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하지만’을 쓰면 한글 2020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붉은 줄을 그어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타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도 않는데 왜 그러나 싶어 무시하다가 하도 거슬려서 쉼표를 넣었더니(‘하지만,’) 붉은 줄이 사라진다. ‘하지만’은 “서로 일치하지 아니하거나 상반되는 사실을 나타내는 두 문장을 이어 줄 때 쓰는 접속 부사”(표준국어대사전)라서, 순접이 아닌 역접의 두 문장을 이어 줄 때는 쉼표로 끊어줘야 한다고 프로그래밍되어 있나 보다. 제법 똘똘한 녀석이긴 하지만 쉼표 좀 안 쓰면 어때서. (지금 이 문장에 쓴 ‘하지만’ 뒤에는 쉼표를 안 넣었는데도 붉은 줄이 안 그어짐. 왜지?) 어쨌거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이미 뱉은 문장을 뒤집거나 역전시키며 논지를 이어가는 습성이 있다는 뜻인데, 세상의 정언명령에 뭔가 늘 변명하거나 항변하며 살아온 태도가 암암리에 문장에 묻어나는 것 같아 섬뜩하면서도 씁쓸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지만’을 전혀 쓰지 않은 글을 한 편 써보리라. 순접도 역접도 아닌 의미들 그대로의 세계를 쌓아보리라.



*표지화 : Young woman writing a letter (1874), by Federico Zandomeneghi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Young_woman_writing_a_letter_%281874%29,_by_Federico_Zandomeneghi.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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