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여름 이화동. 전면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책장과 책장 사이를 부유하는 먼지의 띠가 이따금 무지갯빛으로 반짝인다. 문학아카데미 대표인 박제천 시인과 송정란 편집장, 두어 명의 편집자가 『문학과창작』 월간지(2004년부터 계간지로 전환)를 마감하느라 분주하다. 당시 사무실에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던가? 아니 선풍기가 두어 대 돌아갔었나? 기억나지 않는 무수한 것들 사이로 저 2층 편집실을 가득 메우던 투명한 여름빛만이 선명하다.
당시 나는 한국 문학의 산실 동국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며 시를 습작하던 학생이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여름방학이었는데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내게 지도교수님이셨던 홍신선 시인께서 일자리를 추천해주셨다. “김지혜, 박제천 시인 밑에 가서 일 좀 배워볼래? 시도 배우면 더 좋고.” 박제천 시인의 명성은 이미 동국의 울타리를 넘어서 있었다. 일찌감치 대학 시절에 『현대문학』으로 데뷔를 마치고 열두 권 이상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현대문학상을 비롯해 윤동주문학상과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한 동국의 대표 시인. 편집자로서도 탁월하셨던 박 시인은 문예진흥원에서 자료관장으로 오래 일하시다 1980년대 말에 문학아카데미와 방산사숙을 설립하신 뒤 문예지를 펴내고 시인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고 계셨다.
한 세대 위의 대선배를 상사로 모시고 일하려니 만사가 어려웠지만, 박 시인은 신출내기 편집자를 가르치는 일에 탁월하셨다. 지금 와 돌이켜 보니 내가 만난 고수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자신이 평생에 걸쳐 습득하고 체득한 것의 전모를 절대 처음부터 들이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을 지을 때 터를 먼저 고르듯 입문자의 마음 상태와 태도부터 점검한 뒤 돌 하나하나를 쌓아 벽을 세우듯 체하지 않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나중에 그곳을 떠날 때 돌아보니 박 시인 밑에서 8개월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편집부터 제작, 물류, 회계, 독자 관리 전반을 꿰고 있었다. 종업원이 5인 이하인 작은 출판사라서 여러 일을 도맡아 하느라 불만도 있었으나 나중에 돌아보니 출판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경험한 드문 기회였다.
당시는 활판에서 DTP(Desktop Publishing) 출판으로 진화해서 개인 책상에 앉아 매킨토시 쿼크익스프레스 편집 프로그램으로 책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출판이 전자화되었다 해도 지금처럼 한글 파일이나 워드 파일로 원고를 전달하는 필자는 거의 없었고 문인들은 대체로 수고(手稿)를 우편으로 부쳐왔다. 출근 첫날 내가 한 일도 원고지에 육필로 적힌 시를 타이핑하는 일이었다. 문청이었던 나는 저마다 독특한 필체를 자랑하는 문인들의 육필 원고에 감격했고, 선배 시인들의 시를 마치 내 작품처럼 한 자 한 자 입력하는 일에 푹 빠져들었다. 그때 박제천 시인이 원고를 정리하는 요령 하나를 알려주셨다. “원고가 들어오면 앞 장에 입수한 날짜를 적어두렴. 그리고 다 입력한 원고에는 날짜와 함께 ‘입력 完’이라고 적어두고. 지금이야 한두 편이지만 나중에는 원고가 수십 수백 편 쌓여 정신없어질 테니.”
이후 나는 육필 원고뿐만 아니라 데이터 원고에도 일의 진행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여태 습관으로 굳었다. 막 들어온 원고는 ‘입(入)’, 작업 중인 원고에는 ‘중(中)’, 작업을 완료한 원고에는 ‘완(完)’이라는 꼬리말을 붙여 정리했다. 더불어 편집본은 ‘초고’, ‘1교’, ‘2교’, ‘3교’, ‘OK교’ 등으로 버전을 달리해서 저장해두었다. 사실 이때부터 원고나 파일을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종의 데이터 정리벽이 싹튼 듯한데, 편집자로서 나의 운명은 이때 일찌감치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정리벽은 원고에 그치지 않았다. 박제천 시인은 문학아카데미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한편 방산사숙을 통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 창작 수업을 열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3층 회의실에서 열띤 워크숍이 펼쳐졌다. 어둑해지는 저녁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문학아카데미로 속속 모여드는 이들의 뺨은 불그스레 상기돼 있었고, 나 같은 딸을 두었을 법한 중장년 어른들에게서 시를 향한 어떤 정갈하고도 엄숙한 기운을 느낄 때면 뒤늦게 불타오르는 시심의 근원이 궁금해지곤 했다.
사실 나는 문학아카데미에 입사하기 전에 교내 미당창작문학상을 받으며 주변으로부터 시를 써보라는 추천을 제법 받았는데 감히 문단 데뷔를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평생 시인이나 작가로 사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좋아하는 시를 읽고 음미하면 그뿐, 나의 시가 인쇄되어 누군가에게 읽히고 암송되는 일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데뷔를 목적으로 가열하게 달리는 그들의 열정이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박 시인께서 내게 이런 제안을 하셨다. “월급을 더 주고 싶어도 올려줄 형편이 못 되니 워크숍 수업을 무료로 들어보면 어떻겠니? 의향 있으면 언제든 들어오렴.” 작품 합평회라면 질릴 정도로 참여해봤으나 일반 성인들의 워크숍은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했다. 다만 퇴근 후 시간을 반납해야 하고 무엇보다 상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는 점에서 망설이는 마음이 되었다(어려서부터 나는 관계의 위상이 복잡하게 얽히는 것을 꺼리는 다소 까다로운 아이였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길을 가듯 나는 어느 결에 워크숍의 일원이 돼 있었다. 살아온 인생의 길이와 사연의 폭도 그렇고 습작 기간 자체가 압도적인 이들 사이에서, 나아가 이미 등단을 마치고 여러 권의 시집을 상재한 프로 시인들 사이에서 내 볼품없는 시를 내밀고 낭독하며 함께 습작하기를 여러 날이 흘렀다.
3층 회의실 벽면을 둘러싼 문학아카데미 시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 시인은 시집 출판을 원하는 시인들에게 제작비 일부를 받고 편집 및 제작과 유통을 맡는 일도 겸하셨는데, 문학아카데미 시선은 당시 내가 일하던 시절에 이미 100권을 넘어섰고 현재는 300권을 훌쩍 넘는다. 이 시선이 1989년 창간 후 35년간 질긴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자비로 만들어지던 그 시집들을 제대로 들춰보기도 전에 ‘삼류’라 분류했었다. 그때 내가 애독하던 시집은 문학과지성사, 창비, 민음사, 문학동네, 세계사 등에서 펴내는 모더니즘 시선에 한정되었고, 스스로 구획 지은 메인스트림의 환상에 갇혀 허세 가득한 눈으로 시를 재단하던 참이었다. 이것이 산산이 박살 나는 계기가 있었다.
3층 회의실은 물류 창고를 겸했다. 아니 물류 창고 한가운데 회의 탁자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겠다. 삼면을 빙 둘러 바닥부터 천장까지 철제로 짜인 서가에 댐지에 싸여 낡아가는 책 덩이가 가득했고, 데뷔했지만 무명이나 다름없는 시인들의 시집은 도통 팔리지를 않아서 오랫동안 벽을 이루다가 6개월, 1년 등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파지가 되어 실려 나갔다. 창고 정리는 물류 담당자의 몫이었지만 정리를 좋아하는 나도 그 일을 자청했다. 창고를 정리하는 날이 오면 나까지 3층에 뛰어 올라가 누렇게 변색한 파지용 시집을 골라냈다. 처음엔 버리기 바빴는데, 어느 날엔가 시집을 내던지는 나의 손이 떨렸다. 내 언어가 찢겨 버려지는 것인 양. 워크숍에서 얼굴을 익히고 행간마다 서로의 마음을 귀신처럼 읽어내던 이들의 시집을 버리려니 가슴이 저렸다. 안 되겠다 싶어 나라도 그 시집을 한 권씩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박 시인께 부탁드렸다. “선생님, 저 시집들 한 권씩 가져가서 읽어도 될까요?” 박 시인은 돋보기안경 너머로 나를 힐끗 보시곤 즐겨 태우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그러렴.” 하고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렇게 내 것이 된 시집을 아침 출근 시간에 한 권, 퇴근 시간에 한 권씩 읽어나갔다. 대학에서 즐겨 읽던 무겁고 관념적인 시가 아니라 먹고 자고 싸고 일하며 살아가는 보통의 언어들이 투명하게 말을 걸어오는데, 정말이지 여러 번 놀랐다. ‘아니, 어떻게 이런 명작들을 세상이 몰라주지?!’ 버려진 시집 안에 압축적으로 담긴 보통의 삶에 스며들면서, 거짓 없이 고백하건대 나는 하루에 두 권씩 타인의 시집을 읽고 집에 돌아오면 꼭 나의 시를 썼다. 마감 때문에 야근하다 돌아와도, 술에 취해 돌아온 날에도, 항상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시를 적어 내려갔다. 시를 쓸 수 없는 날에는 타인의 시를 필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시심을 불태우는 이들의 언어는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삶에 대한 환희로 가득했고, 언어적 말놀이 이전에 삶의 민낯들이 포장 없이 뿜어져 나왔다. 담백하면서도 정직한 그들의 언어는 나에게 한없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하고 작고 소심하고 비루해도 괜찮아, 너는 너라서 괜찮아, 우린 모두 한 그루 민들레 홀씨처럼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는 일류 인생이야.’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시들에 몰입하며 보내기를 몇 개월, 어느 날 박 시인이 워크숍 모임에서 나의 시를 크게 칭찬하셨다. “김지혜가 원래 잘 쓰는 겨, 아님 내가 잘 가르친 겨? 갑자기 작품이 확 늘었네!”
그곳에서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을 보내고 500여 권의 시집을 일정 기간 몰입해서 읽어낸 결과는 놀라운 일들로 이어졌다. 그해 겨울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최종심에 내 이름이 거론되었고,1) 이듬해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나의 시 「이층에서 본 거리」가 당선되었다.2) 내 앞에 펼쳐진 급작스러운 일들에 놀라 아연실색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자화상」)라고 썼던 서정주 시인의 시구를 차용해 말하자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삼류 시집이었다는 것.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 당당한 이름이 있었고, 문단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뿐 저마다의 삶에서 주인의식을 잃지 않았던 맑은 언어들을 나는 기억한다. 세상의 뒤꼍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그 언어들에 이제라도 마음 깊이 헌사를 바치고 싶다. 그때 그 시절 폐지를 가득 실은 트럭에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가난하고 비루한 언어였다는 사실도 고백하며….
1)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인 것이다. 선자들은 조정의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김지혜는 아직 젊다. 젊다는 건 생의 지평선이 훨씬 넓게 열려 있다는 뜻이다.”,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일부.
2) “「이층에서 본 거리」 외는 침착한 관찰력과 욕심부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묘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들이 가진 즉물적 상상력도 좋지만, 그 즉물성이 시대적 삶에 대한 암시까지 겸하고 있었다. 너무 기교만 부리고 장식에 매달린 작품보다 오히려 이렇게 가라앉은 묘사를 하는 작품이 돋보였다.”,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일부.
* 표지화 : Bacchanal (1896), Raffaello Sorbi (Italian, 1844-1931), Oil on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