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과 음악

by 연이민

아스팔트와 비행기 내부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세벌의 수영복과 샌들, 계절감이 있는 물건들로 가득 찬 캐리어는 제법 무거웠다. 그때 귀에 베르비에 실황 연주가 흘러 들어왔다.


스위스 마터호른 서쪽, 인구 3천 명의 작은 마을. 겨울에는 스키 리조트에 찾는 사람이 가득한 지역. 차가울 것만 같은 산맥의 베르비에에서 매년 여름 음악 페스티벌이 열린다. 본가 근처 음악 도서관에서 틀어주던 2018년 베르비에 공연 DVD 속의 조성진, 유자왕, 트리포노프, 키신의 연주를 기억한다. 페스티벌에 대한 동경은 점점 커져 그곳에 가보는 것이 일평생의 소원이 되었다. 2025년 7월에 열렸던 그 베르비에 페스티벌 실황을 라디오 클래식 FM에서 틀어주고 있었다.

탑승구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려, 비행기 계단을 오르고, 위 사물함에 싣고 앉는 과정 내내 임윤찬, 손민수 교수의 브람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들었다. 의외의 선곡, 접할 수 없는 장소에서 벌어진 프로그램을 듣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 덕분에 모든 일련의 과정이 쉽고 빨랐다. 비행기 모드로 바꿔달라는 기내 안내 전에 프로그램이 막 끝났고, 개운하게 비행기 모드로 바꿀 수 있었다.

클래식 FM을 듣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익숙한 레퍼토리만 반복하다가 누군가의 선곡이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그때 발견한 클래식 FM은 새로운 선택지가 되었다. 회사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는 식당에서, 퇴근 후 도착한 좁은 집에서 줄곧 들었다. 하루 24시간 이어지는 프로그램 중 가장 신경 써서 듣는 프로그램은 오후 8시부터 진행되는 실황 FM이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의 실황을 함께 듣는 시간.


앉은자리에서 연주가 벌어지는 그곳으로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었다. 베르비에, 반클라이번 콩쿠르, 여름밤 파리콘서트의 청중이 될 수 있기에, 스튜디오 리코딩보다 실황 음반을 선호하곤 했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한순간에 베르비에로 날아갔다. 내가 타는 이 제주 비행기가 스위스로 떠나는 것만 같은 달콤함을 누렸다.

베르비에로 떠나는 상상에 빠진 사이, 현실의 비행은 곧 이륙 준비에 들어갔다. 체크인할 때 고민하지 않았다. 혼자라서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3-4-3 전형적인 비행기 좌석 배치. 왼쪽 날개가 보이는 창가 자리.


창가에 앉아 시선에 걸리는 땅을 관찰했다. 그늘에 걸린 빛에 시린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륙하길 기다렸다. 유턴을 하고 긴 활주로를 만난 비행기는 낮은 속도에 가속도를 더해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덜컹거리며 달렸다. 날개의 앞부분이 위로 향하며 각도가 형성되었고 기체가 부양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과정을 보다가 아차 싶어 핸드폰을 켰다. 음악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오프라인 재생을 위해 과거에 받아둔 노래들을 랜덤재생했다.

<Hibari>가 흘러나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의 ost이다. 사카모토 류이치 작곡인 이 노래의 도입은 바흐 같은 균형감을 갖고 안정적으로 시작한다. 오른손 주제는 밝고 명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왼손 반주가 어쩐지 불협화음처럼 느껴진다. 아이의 천진함과 그들이 맞이한 어려운 현실이 섞여 아름답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영화와 맥락을 공유하는 듯하다. 이 음악을 들을 때면 햇빛 속에서 달리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그늘 속의 관찰자가 된 것만 같다.

비행기는 구름 위를 뚫고 안정적인 기류를 타고 올랐다. 뜨거운 볕이 닿는 손은 뜨거우나 그늘에 몸을 숨긴 체온이 낮아져 서늘해진다. 동일한 선율이 반복되지만 조금씩 어긋나는 변주 속에 갇혀있다. 출발은 이뤄졌고, 시작은 아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