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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삶에도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소설

by 아는개산책

옛날 옛날에,


아주 작은 마을에도 장이 한 번씩 들어서는 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구경을 하고 말을 주고받던 그런 때가 있었단다.


그렇게 그 해의 장이 열린 어느 마을,

한 초로의 남자가 길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원을 그리며 둘러선 곳을 보고 뭔 일인가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지.


그들이 보고 있는 시선 끝에는 한 여자가 나무의자에 앉아있었어.


살은 핏줄이 드러날 만큼 허연데 갈색의 긴 생머리는 비단처럼 곱고, 길게 이어진 코끝 아래 엷은 입술을 가진, 묘한 느낌의 사람이었어.


허나 그녀는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지.


런 그녀의 앞에 안내문 하나가 놓여있었단다.


'저를 웃게 해 주시는 분께는 젊음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 한 문장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이 떼로 몰려 있었던 거야.


장난 반 진심 반.

그들이 알고 있는 온갖 재미난 얘기,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서부터 춘화에나 나올법한 야하고 얼굴 붉힐 얘기들 까지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었어.


말없이 지켜보던 그 남자는 세상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구나 하고 새삼 낯선 기분이 들더래.


그리고 생각했지.

나도.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까.


나의 이야기...


그 남자의 직업은,

사실 소매치기였어.


방금 전에도 한 건을 이미 마치고 두둑해진 주머니를 두드리며 장을 지나는 길이었던 거야.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떠드는 통에 그가 말할 틈은 조금도 어 보였단다.


물론, 말주변 없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 마음도 컸고 말이야.


그래도 신기했던 건.

그녀의 자리에선 그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데 계속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는 거야.


마치 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동네를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나타났고, 그 여자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아마 아무도 성공을 하지 못했던가봐. 그녀를 웃게 하라는 문구를.


렇게 나흘째 되던 날,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구경꾼들이 손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든 날이었어.


그날 그는 마음을 먹었지.


나는요,

소매치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훔치는 걸 배우고 나온 건 아닙니다.

순간에도 훔친 게 있지 않냐 따지고 들면,

그건 아마 날 낳아준 이의 웃음, 아니면 눈물이었을지.


가진 게 많은 사람은 힘들 때 무얼 먼저 버려야 하나 고민이 들겠지만은,

가진 게 나뿐인 사람은 나를 놓아서라도 살기 위해 도망가대요.


원망...,

원망은 없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니까.


허나,

이해하는 것과 살아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더만요.

배가 고파 눈이 돌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지요.


처음엔.

냥 눈앞에 떨어진 지폐 한 장이 저에게 가만 손짓허더.

나중에는 지폐를 쫓아 내 손이 먼저 나가게 된 것은...

저도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한 짝 쓸모없는 나라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원죄.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삼십 년입니다. 자그마치 삼십 년.


이제 저도 퇴물이라 불리지만 엔간해서는 잡을 수 없는 신의 손이라고도 하대요.

신이 전해 들으면 괘씸하다 경을 치려 들겠지요.


그 앞에 서서 변을 고할 수 있다면 개 뻣뻣이 들고 말해볼랍니다.

그래도 셋 중의 하나를 가져갔지, 하나 중에 하나를 가져가진 않으려 애썼다고요.


참, 남에게 말하려 보니 이제야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게, 도덕을 배우지 않았어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건 사실인가 봅니다.


이제 됐습니다.

저도 이제 지쳤어요.

예전만큼 열심히 일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냥 살아지는 대로.

그랬습니다.


그 남자는 한 토막, 또 한 토막.

숨어 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읊어댔단다.


제 얘기도 좀 들어주세요.

하지만 말로 할 순 없어요.

하는 심정으로 말이야.


이야기를 마친 남자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어.


이제는. 그만둘까요.

하지만 방법을 모르는데요.


그녀의 눈빛은 처음 그대로 그의 정면을 응시하면서 속 깊은 곳까지 따스히 어루만지는 듯했지.


그런데 말이야.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그녀가.

분명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어, 분명 서너 명의 사람들이 더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어.

그녀가 그를 향해 웃고 있다는 걸.


그렇게 아무 확신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남자의 발걸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


굽었던 등이 펴지고, 새하얗던 머리는 다시금 검은 머리로 뒤덮였지.

미간에 일자로 파여있던 주름이 펴지고 불룩하니 핏줄만 남아있던 거친 손등에는 사라던 온기가 느껴졌어.


젊어지고 있었던 거야.

약속대로.


집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처음 떨어진 지폐를 보았던 그때 그 나이. 열일곱으로 돌아가 있었어.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지하 단칸방이라는 장소는 달라진 게 없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로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욕구가-


그는 곧바로 노트를 꺼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지.

매일매일 일기를 써왔던 사람이라 그 자체가 어렵진 않았어.


기억을 써가는 남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어.

남들이 손가락질만 하던 자신의 남루함을 처음 마주한 그 여자가 이제는 괜찮다 하고 말해준 것 같았지.


다시 젊어진 그 남자는 결심했단다.

이번엔.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가진 것 하나 없이 태어났지만,

이젠 내가 찾아가 보겠다고.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그 따뜻한 미소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말이야.



서툰 삶


세상이 나를 조롱하기에

나는 더 큰 주먹을 휘둘러 그 입을 막았다.

의 탄생이 불행의 씨앗이었다길래

너를 향한 불행이 아닌 나를 향한 불행으로 걸었다.


화가 불이 되고 불이 인생을 삼켜버린

나의 걸음이 그릇되었다 말할 것이

세상에 과연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내 앞에 나와 크게 고해달라


소년의 걸음이 절벽을 향해갈

그 길이 아니노라

단 한번이라도 손을 내민 적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으니 누구라도 가르쳐 보라.


되었다 이제 되었다

나의 등이 굽고 나의 힘이 세어나가

목소리가 작아진 것이 아님을 느냐


나 몰래 찾아든

밤톨 만한 새끼 하나

내 손 꼭 쥐어주는 그날에

내가 보이고 싶은 것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일 뿐.


지키겠다 퍼부어 대는 나의 주먹도

꼭 쥐듯이 감싸주는 한 사람의 미소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세상이 있는 줄은 나는 미처 몰랐음을.


나는 살겠다

이렇게 나는 살리겄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망을 훔쳐간다.

젊음을 빌려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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