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까이 있는 것들
가족과 이웃,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침묵을 선택하거나, 남의 잘못을 먼저 들춰내며 스스로를 방어한다.
얼마 전 우리 사회를 크게 흔들었던 한 청년 군인의 죽음은 ‘용기’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 곁에서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며 진실을 밝힌 이는 군인으로서의 ‘복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단순한 존경이 아니었다. 항명이라는 무거운 낙인, 보직 박탈이라는 현실적 불이익, 그리고 날카롭게 갈라진 여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사람들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군인의 본분을 저버린 고집이라 했고, 누군가는 불의에 맞선 진정한 용기라 불렀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용기인지에 대한 판단마저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갈리는 사회에서 그의 선택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용기라 부르는가.
어떤 이는 말한다. 독재 체제에 맞서는 저항은 목숨을 건 일이기에 진정한 용기지만, 민주 사회에서의 저항은 생명을 위협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잃고, 관계가 끊기고, 기록으로 남아 다시 회복되지 않는 낙인을 감내해야 하는 두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을 과연 죽음보다 덜한 처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사회적 처벌은 침묵을 학습시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는 손해 보는 일’이라는 냉소를 남긴다. 부당함을 목격하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잔혹함일지도 모른다. 용기를 꺾는 사회는 정의를 잃는 것보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닳게 만든다.
역사를 돌아보면 진정한 용기는 언제나 오해 속에 놓여 있었다. 한 독립운동가는 옥고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존경이나 감사 대신 “먹고살 생각은 하지 않고 헛된 짓을 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나라를 위해 감옥에 다녀온 일이 개인의 무모함으로 평가되는 현실 앞에서, 그의 용기는 위로받지 못했다. 우리는 그 시대를 비난하면서도, 정작 오늘의 용기에는 여전히 비슷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큰 용기조차 쉽게 폄하되는 사회에서, 작은 용기는 더욱 설 자리를 잃는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용기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약함이나 패배로 오해한다. 대신 타인의 실수를 공격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끝없는 비난 속에서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착각한다. 그 모습이 마치 용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공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최고의 용기로 보았고, 벤자민 프랭클린 역시 진정한 용기를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았다. 시대와 문화를 달리 한 두 사람의 말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용기는 상대를 이기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직면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잘잘못을 가르는 지혜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의지가 만날 때 비로소 용기는 완성된다.
내 가족에게, 내 이웃에게,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끼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용기. 그 한 걸음은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작은 용기가 쌓일 때,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사회의 잘못 앞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는 힘을 갖게 된다.
개개인이 이 작은 용기를 잃지 않을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다. 용기는 언제나 거대한 결단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사적인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내딛는 첫걸음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