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까이 있는 것들
떠난 자는 조용히 사라지고, 남은 자는 그 침묵 속에서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벨이 죽었다.
연예인 배정남의 반려견, 벨은 그에게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가족이라 부를 사람 없이 살아온 그의 삶에서, 벨은 딸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아이를 잃은 부모처럼 울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한 울음이었다. 카메라 앞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듯한 울음.
벨과 함께 뛰놀던 레트리버 카파이는 상황을 아는 듯 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를 지켰다.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존재조차 이별의 공기를 느끼고 있는데, 화면 너머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차마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점심 무렵에는 공채 동기의 부친상 조문을 다녀왔다. 영정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고,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죽음이 하루에 겹쳐졌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평소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었다.
우리는 죽음을 떠올릴 때 흔히 고통을 먼저 생각한다. 병으로 인한 쇠약함, 사고의 순간,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공포. 어쩌면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더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까지 더해지면 두려움은 더 커진다. 단테의 『신곡』 속 지옥과 연옥처럼,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가 어떤 심판으로 돌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것 앞에서 늘 겁을 먹는다.
하지만 죽음은 떠나는 이에게만 두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겨진 이들에게는 더 오래, 더 깊게 남는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난 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집 안에 남은 물건 하나, 평소 아무렇지 않게 오가던 동선 하나가 모두 부재를 증명한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하지 못한 말들, 미뤄두었던 표현들, 사소하게 흘려보낸 순간들이 뒤늦게 마음을 후벼 판다. 그때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하는 생각은 끝이 없다.
남은 사람은 떠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얼굴, 점점 약해지는 숨, 돌아오지 않을 눈빛을 끝까지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웃고, 잠을 자야 한다. 상실 이후의 삶은 그래서 더 잔인하다. 슬픔과 일상은 동시에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
나는 죽기 위해, 당신들은 살기 위해.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
담담한 말이지만,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사망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의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문장들 앞에서도 인간의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서 얻은 깨달음은 말로 전할 수 있지만, 죽음을 통과하며 얻는 깨달음은 남겨진 자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있어도, 죽음은 끝내 개인의 경험으로 남는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사랑’이라는 휴먼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40대의 말기암 가장이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가족이 무너질까 봐 자신의 고통을 숨겼다.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아내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 앞에서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죽음은 준비된 이에게조차 끝까지 두렵고, 남겨질 이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장면을 남긴다.
결국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누구도 그 순서를 바꿀 수 없고, 완전히 대비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거창한 깨달음이나 완벽한 삶이 아니라,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길 후회와 미안함을 줄이는 것. 말로 전할 수 있을 때 전하고, 손을 잡을 수 있을 때 잡고, 곁에 있을 수 있을 때 함께하는 것.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죽음이 덜 두려워질지는 모르겠다. 다만 남겨질 사람의 시간을 조금은 덜 아프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떠나는 자의 고요는 막을 수 없지만, 남은 자의 시간만큼은 조금 덜 외롭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