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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설

피부가 진짜 좋으시네요

마음이 담긴 선물

by 세니사

온라인으로만 다섯 차례 만났던 두 사람을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자리였다.

주차한 곳에서 음식점까지의 도보 이동 시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약속 시간보다 15분이나 늦었다.

서로 얼굴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며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내를 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여성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서로를 알아봤다.


나 : “죄송합니다. 주차장에서부터 여기까지 걷는 데 시간이 좀 걸리네요.”

여성 1 : “괜찮아요. 어서 오세요.”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자리에 앉는 순간,


여성 1 : “피부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여성 2 : “네, 그러시네요.”


라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

나이 들수록 얼굴 살이 탄력을 잃고 중력에 순종해 축축 늘어지니 얼굴이 네모가 될 지경인데...?

그런데도 공짜로 생기는 팩조차 냉장고에 모셔 두다 결국 유통 기한이 지나버리는데...?

어째서? 어떻게?

뭐라 할 말이 없어 재빨리 메뉴를 펼쳤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도 세 여성이 죽이 맞아 한참 수다를 떨고 헤어졌다.

차를 몰아 집으로 가다 문득 깨달았다.

아, 두유!


지난봄, 오랜만에 만난 석사 논문 지도 교수님이 두유 제조기 예찬론자가 되어 계셨다.

음식에 관심이 없으셔서 어떤 음식이 맛있더러, 어느 식당이 좋더라,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재직 중이실 때는 늘 바쁘시고 친정어머니와 함께 사셨기 때문인지 댁에서 요리하셨다는 말씀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작년에 은퇴하시고 거의 집에 계시다 보니 오래전에 선물 받은 두유 제조기를 비로소 쓰게 되셨단다.

콩과 야채를 넣어 만든 두유를 한 달쯤 마시니,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 몸이 가뿐하다고 몇 차례 말씀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릴 때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내내 흰 우유 킬러인 아들이 두유를 꾸러미로 주문해 냉장고에 넣어두고 저녁마다 마셨다.

가만히 지켜보니 한 달이 넘도록 꾸준히 마신다.

두유 제조기를 사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선뜻 살 만한 액수가 아니어서 차일피일 미뤘다.


그렇게 7월이 됐다.

오래전, 공무원 첫 발령지에서 동료였던 A 언니와 강화에 바람을 쐬러 갔다.

올봄부터 머리를 비우고 싶어 시작한 뜨개질로 완성한 물건의 사진들을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언니가 예쁘다고 감탄하기에 가방 하나 떠 드리마, 약속했다.

8월에 완성된 가방을 들고 언니를 만났다.

“아이고, 예쁘다. 나이 들어도 난 예쁜 게 좋아. 고맙다.”

잡다한 얘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는 동안 언니가 말했다.


“내가 요즘 아침마다 두유 제조기로 두유를 만들어 먹는데 아주 좋아. 간편하고. 한 잔 마시면 오전 내내 든든해.”

“언니도 두유 만들어 드시는구나. 얼마 전에 뵌 어느 교수님도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 요즘 많이들 만들어 먹잖아. 너 있니?”

“아뇨, 애 때문에 사야 하나 생각만 하고 있어요.”

다른 얘기로 넘어가 식사를 마치고 언니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스커피 두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잠시 책상으로 갔던 언니가 탁자로 돌아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갖고 가서 뜨개실을 사든 두유 제조기를 사든 해.”

“에잉? 언니! 가방값 받아 가는 셈이잖아요. 됐어요.”

내 사정을 잘 아는 A 언니가 내가 선뜻 그 물건을 사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말은 됐다 하고는 두유 제조기 살 욕심(!)에 봉투를 챙겨 나와, 그날로 두유 제조기를 샀다.


일주일에 오일, 다양한 콩과 견과류를 섞어 만든 두유를 아들과 나누어 먹었다.

어라? 몇 달이 지나니 몇 가지 변화가 느껴졌다.

계속 일은 해야 하는데 기력이 없다 느낄 때 과자를 집어 먹곤 했었다. 그런데 기력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드물어졌다.

몇 년 전부터 목에 하나둘 돋아나던 일명 쥐젖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세수하며 목을 훑을 때 느껴지는 매끈함이 기분 좋다.

얼굴 피부가 조금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졌다.


아, 이거였구나! 피부가 좋으시네요,에 대한 답.

(오해 마시길. 난 두유 제조기 제조업체와 무관하며 판매자와도 무관함.)


두유 제조기를 작동시킬 때마다 A 언니 생각이 난다.

A 언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한테 난 대체로 받는 사람이었다.

그분들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가진 건 정말 아무것도 없으면서 현실적이지 못하고 영리하지 못하고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해, 늘 떠돌며 어리석은 선택을 해온 나 같은 인간이 말이다.

그러니 오늘도, 열심히 두유(에 담긴 마음) 마시고 힘내자! 으~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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