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즈 무어, <숲의 신>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행나무, 2025)은 두 건의 실종 사건 수사가 서사를 이끄는 동력인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사건은 범죄가 아니라 ‘인물’이다. 소설은 숲(야성)과 집(문명)을 네 인물의 내면에 배치해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문명이 야성에 의해 타락하는가, 야성이 문명에 의해 타락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을 이해하려면 네 인물 가운데 ‘숲’의 현현이라 할 만한 바버라에 대한 탐구로 시작하는 편이 수월하다.
바버라 – 순전한 야성의 현현
숲 혹은 ‘숲의 신’으로서 바버라의 면모를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은 이렇다.
거기에, 바버라 반라가 꼿꼿하고 강인하게 서 있다. 육신을 집 삼아, 숲을 집 삼아, 어딘가 불멸의 존재 같은 구석이 있다고, 주디는 생각한다. 영혼, 유령, 아이보다는 신 같다. [691쪽]
바버라는 숲으로 상징되는 야성의 현신이다. 따라서 바버라의 불멸성은 숲 자체보다 인간 내면에서 야성이 불멸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불멸하는 야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버라를 통해 이해해 보자.
숲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바버라는 야생의 위험에서 제 몸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알고, 숲의 생명으로 제 생명을 보존할 줄 알고, 생명을 해쳐 제 생명을 이어가는 행위에 내재한 위험성을 안다. 또한 그녀는 약자를 대할 때 무작정 보호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자신을 빛내기 위해 그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바버라는 약자의 자존을 믿고 격려한다.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동물을 잡아 죽여 껍질을 벗기는 야생성을 지닌 자이면서 자존하는 자들의 공존을 도모하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자존을 위한 야생성과 곁에 있는 이의 자존을 격려하는 공존, 이것이 바버라로 상징되는 숲의 불멸성인 셈이다.
제이컵 - 문명으로 타락한 야성 1
바버라가 문명 이전의 야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제이컵 슬루터는 타락한 야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숲은 한때 슬루터 가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숲에서 벌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숲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슬루터 가는 숲을 팔 수밖에 없었다. 숲을 잃음으로써 생계를 위한 자원을 잃은 제이컵은 문명 안에서 연쇄살인범이 된다.
제이컵은 숲에서 내몰려 들어간 문명 안에서 생존할 길을 찾지 못했기에 범죄자가 된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의 일가는 나무를 베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는가. 애초에 그는 숲에서 공존한 것이 아니라 숲을 착취했던 것이다. 제이컵은 문명에 발을 들였으나 그 문명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문명인이 되지 못한 채, 타인을 도구화하는 문명으로 인해 타락한 야성인 셈이다.
피터 3세 - 문명으로 타락한 야성 2
제이컵의 짝패라 할 만한 인물은 피터 3세다. 할아버지 피터 1세는 슬루터 가의 소유였던 숲에 반해 그 숲을 사들였다. 그리고 숲에 가족이 거주할 본채와 사냥꾼들이 머물 오두막들을 지었다. 그는 본채에 독립독행self-relianc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삶에 영향을 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수필 제목 독립독행.
그러나 작품에서는 에머슨의 독립독행과 피터 가의 독립독행은 진정한 자립이 아니다. 에머슨에게 독립독행이 문명인의 취미 생활이거나 몽상이었다면, 피터 가에게 독립독행은 실상은 극도의 의존이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이들과의 인맥 그리고 부유하지 않은 이들의 노고를 통해 축적한 돈을 소비하고 또 소비하는 삶은 자립이 아니라 의존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문제는 피터 3세의 내면에 도사린 ‘불멸의 야성’이다. 그가 세련된 문명인의 삶을 살며 억눌러 둔 야성은 딸의 이름을 ‘바버라’로 짓게 함으로써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내비친다. 영어 바버라는 그리스어 바르바로스에서 유래했다. 고전적으로 이 말은 ‘외부의, 거친, 이방의 존재’를 뜻했으나, 중세 이후에는 ‘문명 바깥에 있는 야만성’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했다. 그러니 바버라는 문명에 의해 억눌려온 피터의 야성이 비집고 나온 균열인 셈이다.
하지만 문명인 피터 3세의 이 균열은 ‘문명’을 상징하는 인물에 의해 이미 찢긴 가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다. 따라서 피터 3세 역시 ‘문명으로 타락한 야성’, 즉 제이컵의 짝패인 것이다.
델핀 – 우아한 문명의 현현
지성, 카리스마, 배려, 진보성을 갖춘 우아한 델핀은 ‘문명’의 현현이다. 그런데 그녀의 지성은 타인을 세련되게 폄하하고, 그녀의 카리스마는 타인에게 순종을 요구하며, 그녀의 배려는 약자를 더 무력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녀의 진보성은 타인을 고통에 빠뜨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가장 끔찍한 점은 그 우아한 매력으로 타인의 야성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앞서 우리가 제기한 질문에 대해 작가는 문명이야말로 순전한 야성을 타락시키는 근원이라고 답했다고 이해할 만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명을 버리고 숲으로 떠나 바버라가 되어야 할까. 작가가 그런 극단적이고 표면적인 선택을 독려하는 바는 물론 아닐 것이다. 경계하라, 부디. 이 정도 아니겠는가.
바버라와 개츠비
여기까지 생각을 밀고 오니 문득 개츠비가 떠오른다. 개츠비는 부에 의해 우아할 수 있었던 데이지를 선망하고 사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만큼. 그런데 데이지는 왜 개츠비를 사랑했을까. 그것은 개츠비가 환기시키는 야성 때문이었다. 사실 개츠비가 진실로 추구했던 바는 우아한 부가 아니었다. 개츠비가 내면 깊이 원했던 바는 태초의 안식과 평안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그 소망으로 인해 죽게 된다.
개츠비는 왜 바버라가 될 수 없었을까. 부유한 부모와 함께 숲에서 살았던 바버라에게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알게 하고 지원해 주는 T. J의 오두막이 있었다. 그러나 개츠비에게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슬프다. 얼마간 개츠비인 우리는 아무래도 바버라가 되기 쉽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