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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설

피를 마시는 땅과 인간

- 파라마운트+의 드라마 《1883》

by 세니사

* 이 글에는 상당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모른 채 드라마를 감상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 서부 개척 초기의 상황을 소재로 한 드라마 《1883》서부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자유와 오만, 문명과 자연, 인간의 본성에 관해 질문하는 철학적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개척자들의 갈망과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은 엘사 더튼이다. 그녀는 미국 동부의 문명사회에서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던 소녀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소녀의 가족은 야만의 땅, 서부로 향한다. 우연히 독일 이민자 무리에 합류해 수십 명이 함께 출발했지만, 목적지에 이르러 또는 이르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이들은 일곱 명에 불과했다.

엘사는 그 여정에서 드레스를 벗고 판타롱을 입은 카우걸이 되었다가, 판타롱을 벗고 인디언 복장을 한 전사가 되었다. 문명이 여성에게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여정은 낭만적이다. 하지만 그 낭만은 자연보다 잔혹한 인간들,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선택에 이미 내재해 있는 원리에 의해 비극으로 치닫는다.



짐승과 사람 사이 – 존 더튼의 목소리

《1883》이 일반적인 서부극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대사들에 인간과 세계에 관하여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더튼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사슴을 쏘아 죽인 직후 아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대표적이다.


“우릴 살리려고 이걸 죽인 거야. (...) 아들아, 우리가 무언가를 죽일 때 우리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워진단다. 우린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는 거야. 그게 인생이란다.” - 3화의 대사


짐승과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은 인간이 동물과 신의 중간에 있는 존재라는 오래된 사유와 동치이다. 그런데 이 대사에서 알 수 없는 점은 ‘사람’의 정체다. 무엇보다, 사람은 정말로 살기 위해서만 살생하는가. 이 드라마에서조차 그렇지 않다.


백인 강도들이 한 인디언 가족의 캠프를 도적질한다. 그런데 굳이 그 가족 모두를 즉시 살해하거나 강간 후 살해한다. 뒤늦게 그곳에 도착해 살해당한 시신들을 돌아보며 등장인물 가운데 한 인물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재미로 한 짓이야.

재미로 살생하는 자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일까? 아니면, 제임스 더튼의 대사에서 명확히 정체를 밝히지 않은 ‘사람’에 가까운 존재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이 의문은 2000년대의 현실로 변주된다.


매년 사망자가 발생하는 근로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기업은 기업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근로자의 생명을 돌볼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업도 짐승과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면, 생존도 아니고 재미도 아닌 또 다른 이유로 죽음을 방관하는 제3의 존재인가.

작품이 던진 질문은 약 200년 전 짐승과 사람의 경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강력히 지배하는 제3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무자비한 자연 vs. 교활한 문명 – 엘사 더튼의 목소리

존 더튼의 딸 엘사 더튼의 독백 또한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곤 한다.

엘사는 서부로 가는 여정에서 자연에 의해 죽는 사람들을 숱하게 본다. 독사에게 물려 죽고, 늑대에게 물어뜯겨 죽고, 강물에 휩쓸려 죽는 사람들. 무자비한 자연 앞에 인간은 한없이 약한 자이다.

이 경험 후 엘사는 이렇게 독백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관심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당신이 죽어도 세상은 개의치 않는다. 당신의 울부짖음도 듣지 않을 것이다. 땅 위에 피를 흘리면 땅은 그 피를 마실 것이다.” - 3화에서의 독백


자연이 인간의 안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은 엘사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엘사는 완전히 다른 정서를 체험하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독일 이민자들 가운데 말을 탈 수 있는 남자가 한 명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엘사가 카우보이들과 함께 소몰이를 한 것이다. 엘사는 이 일을 하면서 무한한 자유와 힘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이후 사랑에 빠진 인디언에게 버펄로를 사냥하는 방법을 배우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한층 강해진다.

무자비한 자연과 제 내면의 힘을 경험한 엘사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드레스는 (...) 질투하는 여자들과 탐욕스러운 남자들의 눈길로부터 내 몸의 여자다움을 꼭꼭 숨기는 감옥이다. 그들의 낮은 자존감이나 의지력 부족이 내가 고려할 문제인 것처럼. 약자 스스로 강해지기보다 강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세상에선 다신 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난 여기 남을 것이다. 이곳은 약자가 원하는 것엔 관심 없다. 이곳은 약자를 먹어 삼킨다.” - 9화에서의 독백


무심하고 난폭한 자연이 교활한 문명보다 낫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서부 어느 땅에 정착해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교양을 요구할 백인들의 마을,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살아갈 그 마을에서 함께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땅이 피를 마시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피를 마시는 인간의 문명에 등을 돌리기로 마음먹은 엘사의 독백은 불편할 만큼 솔직하다. 금발의 미녀이지만 코만치족처럼 말을 탈 줄 알게 된 엘사가 약자들이 자신을 끌어내리는 문명을 거절하는 선택은 위풍당당하다.

그런데 그녀의 대사에는 놀라운 우월감이 배어 있다. 나는 아름답고 강하다, 나는 내 아름다움과 힘을 한껏 누릴 것이다. 자신의 힘을 자각한 인간은 결국 우월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아름답고 강한 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자의 피를 마시는 자가 되는가?

작품은 매력적인 인물 엘사를 통해 인간에 관해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



아름답고 참혹한 서부 서사시

야생에 남겠다는 엘사의 선택은 교활한 문명이 채운 족쇄를 벗어던지고, 생명이 넘치는 세계에서 목숨 걸고 자유롭겠다는 강자다운 결단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간접적으로 문명을 자처하는 백인들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자연과 일체로 보이는 한편 그녀보다 강한 이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이 비극은 어떤 면에서 야생을 선택한 그녀 영혼의 완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모호하고 미묘한 흔들림, 바로 이 흔들림이 이 작품을 예술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1883》은 단순히, 초기 개척 시기에 서부의 척박한 현실을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자연과 문명, 짐승과 인간, 자유와 오만,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존재에 관해 불편한 질문들을 보여준다. 아름답고 참혹한 풍경 그리고 매력적인 인물을 통해. 결국, 이 작품은 타자의 피를 마시며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는, 한 편의 서부 서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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