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은빛 독을 마시는 붙박이들
사각 용기에 담긴 은(銀)의 표면이 고요하다. 반들반들한 사각의 은(銀)이 구불구불 솟아오르며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야기의 한 장면을 부조해 낼 것만 같다. 시각이 부추기는 몽상.
의자 끄는 소리, 비닐 뜯는 소리, 나무 상자에 쏟아지는 부품 소리, 높고 낮은 잡담 소리…… 마침내, 자잘한 소음들을 제압하는 고음의 벨소리가 후려치듯 울려댄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줄 이은 형광등들이 일제히 밝아진다. 쏟아지는 불빛 아래 거울처럼 투명해진 사각 은(銀)에서 독한 납 냄새가 퍼져 나간다.
“PCB 올려!”
절름거리며 라인 중간 지점으로 걸어간 생산 과장의 호령. 은(銀)의 거울 위에 PCB 뒷면을 살짝 담가 납 도금을 하는 Y의 손이 분주하다. 오른쪽 엄지와 검지의 손톱들이 유난히 길다. 그 긴 손톱으로 Y는 잔업이 없는 날 저녁, 클래식 기타 줄을 뜯는다. 사고무친인 그는 공장 천장 아래 낮고 작은 숙직실에 산다.
Y와 마주 앉아 납 도금하는 K는 늘 말이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홀어머니 손에 키워졌다는 K는 밤마다 당구장으로, 나이트클럽으로, 여관으로, 술집으로 떠돈다. 그가 써서 없애고 싶은 건 돈이 아니라 시간 같다. 어제, 오늘, 내일.
J 언니는 만성 염증으로 오른쪽 손목에 붕대를 친친 감고도 가장 많은 부품을 꽂는다. B 아줌마는 옷이 더러워질까 검은 토시를 끼고 조심스레 팔과 손을 움직이기에 제일 적은 수의 부품을 꽂는다. H는 잇몸을 한껏 드러내 맹하게 웃으면서 이따금 큰 소리로 실없는 말을 건네며 들뜬 부품들을 꾹꾹 누른다. C 언니는 알이 두툼한 안경을 끼고도 한껏 고개를 숙여야 부품을 올바른 자리에 꽂을 수 있다. P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꽂아내는 부품 수가 늘고 준다. 새댁 언니는 인두 끝에서 녹는 납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덜 마시려고 한여름에도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다.
늦은 오후가 되면 공장 공기는 사각의 납 용액이 퍼뜨린 미세한 입자로 가득 차 머리가 지끈거린다. 신비로운 은빛이 퍼뜨리는 독(毒)을 온종일 호흡하며, 카-스테레오 기판을 쏟아내는 붙박이 인간들. 그들 속에 있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의 나.
인간다운 삶?
우리가 붙박인 작업대는 초록이었다. 회전하는 초록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붙박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에 맞춰져 있었다. 캐리어가 내 손에 닿는 순간, 숨을 멈춰야 했다. 내 몫의 부품을 PCB에 모두 꽂아 뒷사람에게 넘길 때까지 숨 쉬는 데 소비할 시간이 없었다. 호흡 한 번에, 부품 한 점 지연. 대여섯 번의 지연이면 캐리어 하나가 밀렸다. 코앞에 캐리어 탑을 쌓고 싶지 않다면 자연스럽게 숨을 쉬면 안 됐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캐리어가 쌓이면 생산 속도가 늦어지니 생산 과장은 작업 시간 내내 할당량을 조정했다. 캐리어를 쌓은 붙박이의 부품 한 점을 빼서, 여유 있어 보이거나 손이 빠른 붙박이에게로. 그러니 편하게 숨 쉬고 조금 미안해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붙박이들이 있다. 미련해서든 독해서든 반항적 이어 서든.
성격에는 결과가 따른다. 캐리어에 꽂힌 PCB의 작은 구멍에 부품을 빠르고 정확히 꽂으려면, 손가락에 힘을 빼고 손목에 힘을 주어야 한다. 캐리어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시간에만 호흡하면서 내리 두 시간, 하루 열한 시간, 주 6일, 고개 들 틈 없이 손목 긴장을 유지하는 그 동작을 수년 동안 반복하면 어깨와 손목이 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작업을 자동인형처럼 반복하는 허다한 날들을 견디려면 무리한 속도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편이 나았다. 생각하거나 느낄 틈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도 심장에서 치솟는 비명을 목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순간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쉼 없이 돌고 도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살아갈 모든 날들이 이렇게 붙박인 무한궤도이리라는 절망과 공포 속에 고개 드는 의문을 견딜 수 없는 순간.
검정고시 공부를 하며 내가 알게 된 이치들 가운데 하나는 인간에게는 인간다운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난 인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난 무엇인가.
절로 고개 드는 의문을 누를 수 없는 날은 점심시간 종이 치자마자 옥상으로 갔다. 처음에는 그저 맑은 공기를 마시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허리 높이쯤의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강렬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지면에 배를 딱 붙인 채, 온몸으로 밀며 기어야 하는 남루한 시간을 끝낼 수 있다. 제자리 무한궤도를 멈출 수 있다.
아찔한 바닥의 질긴 유혹에 유독 강하게 끌린 어느 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느닷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파랗게 텅 빈 하늘. 맑고 파란 하늘 아래 기어이 살고 싶은 내 안의 목숨이 지르는 또 다른 비명.
살아 봐, 다른 날이 올 거야.
어떻게든 버티려면 변화가 필요했다.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다면 직장이라도 바꿔야 했다. 퇴근 후 목적지 없이 길을 걷다 전신주에 붙은 모집공고를 보았다. 중졸 이상, 18세 이상 50세 이하. 시급이 조금 더 높았다. 사표를 내고, 2년 남짓 일하며 꽤 정든 사람들이 있는 그 공장을 떠났다.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새로 들어간 회사는 작지만, 메트로놈을 제조해 수출하는 본사였다. PCB 작업은 하청을 주고 본사 공장에서는 몇 단계의 검사와 포장 작업만 했다. 여섯 달쯤 지나자 모든 검사를 익혀 어느 자리에서든 일할 수 있었다. 이따금 공장에 와 생산 작업에 참여하는 관리 이사님에게 일을 가르쳐 드리기도 했다.
이듬해, 경리과 직원 한 명이 퇴사하자 관리 이사님은 나를 그 자리로 보냈다. 나라면 배워서 할 수 있을 듯하니 한번 해보라고.
그렇게 처음으로 사무직 일을 하게 됐다. 지루하지 않고, 몸이 편하고, 남 보기에 번듯하고, 급여가 좀 더 많으니 당연히 흔쾌했다. 하지만 당장의 기분이나 현실적 이득보다 한층 의미 있는 사실 하나를 깨우쳤다. 나도 머리 쓰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도 꽤 잘한다는 사실.
사무실 직원들은 대학 진학을 권했지만, 오빠가 막 제대했고 동생은 야간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경제적 책임이 내 몫인 상황은 끝났지만, 오빠와 동생에게 의지해 대입 준비를 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중 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 언니에게 제안을 받았다. 사정이 생겨 고향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생각이 있다면 그동안 먹고 자는 일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기회였다. 하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 다니는 동생에게 살림을 맡겨야 했다. 더욱이 몇 달 공부한다고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고, 언니가 언제 나를 부담스러워하게 될지 몰랐다. 그런데, 복잡한 생각들 사이로 꼿꼿이 고개 드는 생각 하나.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느냐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 PCB(Printed Circuit Board, 인쇄회로기판) : 전자제품 내부에서 부품들을 전기적으로 연결하고 기계적으로 지지하는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