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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만, 생존뿐이라면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by 세니사

9만 회 이상 인용된 행복 논문들을 100편 이상 썼다는 심리학자 서은국,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은국에 따르면 인간은 살기 위해 행복한 존재다.

인간은 100% 동물이다.

동물의 궁극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다. 그래서 뇌는 인간이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반복하도록 진화했다.

뇌는 인간이 생존에 유익한 행동을 할 때 쾌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내 그 감정을 소멸시킨다.

생존은 ‘지속’되어야 하는데, 한 번의 쾌가 마냥 유지된다면 생존에 기여하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뇌가 생존을 위해 진화시킨 이 쾌의 감정에 인간은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쾌의 감정을 느끼는가.

‘음식과 사람’이다.

이 둘 가운데 서은국이 특히 강조하는 쾌의 원천은 사람, 즉 사회적 관계이다.

긍정적 관계는 인간의 장기적 생존을 돕는다. 그래서 뇌는 긍정적 관계를 경험하고 있을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게 한다.

부정적 관계는 생존에 불리하다.

그래서 뇌는 부정적 관계에 놓인 인간이 불쾌를 느끼게 한다.(『행복의 기원』, 21세기북스, 2014)


이것이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의 기원’을 탐구한 서은국의 주요 논리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전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을까?




동생을 미워했냐고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언제나 챙겨 주어야 하는 동생이 귀찮고 짐스러웠다.

한겨울에 마당 수돗가에서 영하의 추위 속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옷을 빨아 입히는 일, 끼니를 챙겨 주어야 하는 일,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 (없는 날이 더 많았지만) 연탄이 있는 겨울은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아야 하는 일...

살림살이와 동생 돌보는 일이 모두 내 몫이건만, 아무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어린 동생이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그 마음이 전부는 아니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에 부모를 잃게 된 어린 동생이 안쓰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굶는 일에서든 추위에 떠는 일에서든 매 맞을 공포에서든,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위안이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학교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난 공부를 곧잘 했다.

늘 단정하게 입고 다녔다.

더욱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거짓 일기를 썼던 모양이었다.

집에서 만든 맛난 간식을 먹은 얘기, 여기저기 놀러 갔다 온 얘기, 동생과 다툰 얘기... 내 일기장에 생생하게 쓰인 그 모든 얘기에는 늘 부모님이 계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위장을 벗겨낸 두 사건이 벌어졌다.

나와 같은 학교에 다녔던 동생의 담임 선생님이 동생에게서 머릿니를 발견했다.

나의 담임 선생님은 동생의 담임 선생님에게 뭔가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가 늘 단정했기 때문에 흘려들으셨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시간, 내가 책상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다.

나를 양호실로 보냈던 담임 선생님은 양호 선생님에게 내가 영양실조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한 학급 학생 수는 70명대였다.

점심시간에 나는 늘 운동장으로 나갔지만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런데 양호 선생님이 내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다고 얘기하신 것이었다.

이런 일이 꽤 오래 반복된 듯하다는 얘기도.


담임 선생님은 급우들에게 돌아가면서 내 몫의 도시락을 싸 오게 했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나는 한 번도 그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쌀을 한 봉지씩 가져오게 해, 모인 쌀을 남학생들에게 들려 우리 집으로 보냈다.

쌀이 생겨 행복했던가.

그랬다면 아이들이 싸 온 도시락을 먹지 않았을 리 없다.


자존심이 배고픔을 앞선 이 반응을 진화 심리학에 따라 해석하면, 장기적 생존에 자존심이 굶주림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화 심리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어쩌면 또 다른 경로로 만들어진 자존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나는 꽤나 많은 책을 읽어댔다.

여인이 사주었던 위인전기전집을 다 읽은 후에는 학급 문고의 책들을 읽었고, 교장실 청소를 하러 갔다 교장실 서가에 꽂힌 책을 빌려 읽기도 했다.


오지 않는 아버지와 여인을 기다리는 마음도, 배고픔도, 공포도, 책을 읽는 동안은 잠시 멀어졌다.

글 속의 인물과 문장 들은 내게 옳고 그름에 대해 말했다(동생을 때리는 일은 옳지 않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도 말했다(타인의 동정은 내 존엄을 위협할 수 있다).

다른 날이 오리라고 믿어야 한다(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책마저 읽을 수 없는 날이 오고 말았다.

12월이었는지 2월이었는지, 중학교 지원서를 쓰던 시기에 담임 선생님은 오빠와 면담을 했다.

선생님은 성실하고 시키는 일을 잘 해내니, 낮에는 학교 급사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돕겠다고 했다.

오빠는 대답했다.


“제 동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학교도 제가 보내겠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열다섯 살 소년 가장을 이기지 못했다.

졸업과 동시에 오빠가 일하는 가게의 사장님이 소개한 동인천 어느 의상실 작업실로 출근했다.

수년 전 언니가 출퇴근했던 그 동인천 의상실 골목에 나도 발을 들인 것이다.


작업실은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돌아갔다.

네댓 명의 언니들이 단추와 어깨씽 달기, 미싱 돌리기, 다림질하기를 나누어 맡아하고 있었다.

나는 제일 먼저 출근해 청소를 하고, 언니들의 심부름을 하고, 사장님이 재단해 둔 옷들을 가봉하고, 시장으로 부속품들을 사러 다녔다.


오빠랑 내가 버니 밥은 굶지 않았다.

하지만 넉넉히 연탄 들일 돈까지는 나오지 않아 얼음이 어는 방에서 지내는 날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빠의 매질도 변함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사한 장수동 집에는 셋방이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맞으며 우는 여자애들 소리가 아무리 높아도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빠의 매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서은국의 말처럼 쾌(행복)의 근원이 음식과 긍정적인 사회적 관계에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굶지 않게 되었고, 친절한 의상실 언니들에게 꽤 높은 급여를 받는 전문 기술을 배워 장기적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난 크든 작든 행복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봐도 그 시기에, 나는 지나온 어떤 날들보다 큰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읽어댄 책 덕분인지, 마음의 고통이 한계를 초과했기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난 동생을 때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해칠 궁리에 빠져 들었다.

먹고 자고, 하루 열두 시간 일하고, 집에 돌아와 또 집안일을 하는, 다만 생존뿐인 이런 날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삶을 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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