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게 되는 곳, 기억이 만든 공간

01. 해마 속에 저장된 경험과 가치가 만들어내는 나만의 장소

by Jeonghoon KIM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기억 속의 공간과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건과 시간과 함께 맞물려 있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것은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그때 몇 살이었는지, 친구들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흐릿해질 수 있다. 하지만 함께 뛰놀던 놀이터, 오래된 골목, 햇살이 비치던 교실 같은 장소는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는 뇌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해마(hippocampus)는 단순히 위치 정보를 저장하는 기관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경험한 감정과 가치(value)를 함께 저장한다. 그래서 특정 장소를 떠올리면, 그곳에서 느꼈던 즐거움이나 설렘, 안도감이 함께 되살아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간과 연결된 사건과 감정까지 한꺼번에 회상하게 된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연구팀이 Science Advances에 게재한 연구에 따르면, 중간 해마(intermediate hippocampus, iHP)의 장소세포(place cells)는 높은 가치를 지닌 장소를 낮은 가치의 장소보다 훨씬 더 자주 재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


어릴 적 뛰어놀던 놀이터나 오래전 살던 집을 떠올릴 때, 우리는 공간의 형태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는 길과 문뿐 아니라, 뛰놀던 순간의 바람, 발끝에 닿던 모래, 햇살에 반짝이던 창틀 같은 감각까지 함께 담겨 있다.


이처럼 장소는 기억을 붙잡는 중심 역할을 하며, 사건이나 사람보다 오래, 그리고 더 또렷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찾게 될까. 왜 어떤 카페는 마음속 단골이 되고, 어떤 골목은 늘 발걸음을 멈추게 할까.


이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배측 해마(dorsal hippocampus, dHP)에서 발견된다. 연구에 따르면 배측 해마에서는 높은 가치의 장소로 이어지는 경로(path)를 나타내는 장소세포가 중간 해마보다 더 많이 재생되는 경향을 보였다 [2].

즉, 우리가 골목길을 걸을 때 목표 지점과 연결된 익숙한 이동 경로가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이끈다. 해마의 서로 다른 영역은 장소 자체의 가치와 그곳으로 향하는 경로를 구분해 기억하고, 이를 통해 목표 지향적 공간 학습(goal-directed spatial learning)을 최적화한다 [3].


집이라는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와 닮아 있다.

집이 편안한 이유는 평수나 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쌓인 감정과 기억이 해마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시간, 부엌에서 느꼈던 작은 성취감, 침대에 누워 하루를 돌아보며 떠오른 생각들—이 모든 사소한 순간이 공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마음이 느슨해지고, 오래된 장소를 다시 찾을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비단 집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친구와 함께 걸었던 골목길, 자주 들르던 카페, 공원 벤치에 앉아 느꼈던 바람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간들은 단순한 시각 정보나 지도 위의 좌표가 아니라, 감정과 경험으로 채워진 기억의 장소다.


해마는 반복 경험을 통해 가치가 누적된 장소를 더 강하게 재생한다. 그 결과 우리는 무심코 길을 돌 때조차, 과거에 느꼈던 안도감이나 즐거움을 되찾듯 행동하게 된다.


공간의 진정한 가치는 설계도나 건축적 아름다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가 공간의 가치를 만든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사용자에서 건축가로 옮겨간다. 기억과 가치가 공간을 다시 찾게 만든다면, 건축가는 무엇을 설계해야 할까.


해마가 기억하는 것은 형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반복된 경험과 감정이다. 한 번의 강렬한 장면보다, 다시 돌아오며 축적된 감정이 장소의 가치를 만든다. 이는 건축이 단발적인 인상이나 조형적 완성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채우기보다 여지를 남기고, 시선을 지배하기보다 움직임을 유도한다. 사람들이 머무르고,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빛의 시간, 동선의 리듬, 잠시 멈출 수 있는 여백이 기억을 만든다.


결국 건축은 공간을 설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반복될 삶의 가능성을 설계하는 일이다. 공간은 설계자의 의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느끼고, 선택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기억과 감정을 품은 장소가 된다.


그래서 좋은 건축은 한 번 보고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다시 찾게 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사람은 공간과 함께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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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eung-Woo Jin, Hee-Seung Ha, Inah Lee, Selective reactivation of value‑ and place‑dependent information during sharp‑wave ripples in the intermediate and dorsal hippocampus. Science Advances, vol. 10, issue 32, aug 2024, 바로가기 :

“We found that place cells in the iHP representing higher-value locations were reactivated more frequently than those coding lower-value locations.”


[2] Jin et al., (2024) :

“In contrast, the activities of place cells in the dHP coding the routes leading to high‑value locations were replayed more than those in the iHP.”


[3] Jin et al., (2024) :

“Our findings suggest that value‑based differential reactivation patterns along the septotemporal axis of the hippocampus may play essential roles in optimizing goal‑directed spatial learning for maximal re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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